저자 : 채사장
2014년 겨울에 출간한 첫 책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밀리언셀러에 오르며 2015년 국내 저자 1위를 기록했다. 차기작으로 현실 인문학을 다룬 《시민의 교양》과 성장의 인문학을 다룬 《열한 계단》, 관계의 인문학을 다룬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까지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200만 명이 넘는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책과 동명의 팟캐스트 〈지대넓얕〉은 장기간 팟캐스트 순위 1위를 기록하며, 정치 내용 판도의 팟캐스트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2015년 아이튠즈 팟캐스트 1위를 기록, 현재까지 누적 다운로드 2억 건을 넘어서며, 방송이 끝난 지금도 여전히 지적 대화를 목말라 하는 청취자들의 끝없는 지지를 받는 중이다.?성균관대학에서 공부했으며 학창시절 내내 하루 한 권의 책을 읽을 정도로 지독하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문학과 철학, 종교부터 서양미술과 현대물리학을 거쳐 역사, 사회, 경제에 이르는 다양한 지적 편력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사회생활을 하며 얻은 경험들은 오늘 그가 책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저자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탐구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더 깊어졌다. 그 결과물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편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가 자기 삶을 제대로 응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현재는 글쓰기와 강연 등을 통해 많은 사람과 만나며 삶과 분리되지 않은 인문학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위대한 스승들'과 '거대 사상'. 이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우선 위대한 스승들은 인류 역사 이래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탄생한 현명한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다양한 사상을 말했고, 철학과 종교를 일어서게 했다. 인류에게 올바름이 무엇인지 말해주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었다.
다음으로 당신이 기억해야 하는 단어는 거대 사상이다. 이것은 위대한 스승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신비한 사상은 일원론이다. 자아와 세계라는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존재가 실제로는 하나이며, 근원에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이다.
이 책의 목표는 뚜렷하다. 그것은 인류 사상가의 밑바탕을 이루는 거대 사상을 당신의 마음속에서 깊게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책의 끝에 닿았을 때, 당신은 인류라른 거대한 집단이 흥미롭게도 하나의 주제, 하나의 담론, 하나의 질문에 끈질기게 매달리고 탐구해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당신의 삶 중간 어딘가에서 당신을 찾아왔지만, 이 책이 인류의 가장 거대한 지혜를 다룬다고 할 때, 순서상 이 책은 당신 삶의 가장 앞에 위치해야 한다.
준비 운동
세계의 구조화와 판단중지
위대한 스승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두어야 할 개념이 있다.
'세계의 구조화'와 '판단중지'라고 부를 것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세계의 구조화란, 말 그대로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으로, 세계를 추상화해서 단순하게 바라보는 과정을 말한다. 하나하나의 사물에 세부적으로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구조에 따라 수많은 개체를 분류하는 것이다.
"세계의 근본 구조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뭐라고 답하겠는가?
"세상은 생물과 무생물로 나뉜다"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혹은 "세상은 남자와 여자로 나뉜다"라고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이 중에서 어떤 구분이 가장 마음에 드는가? 어떤 구조화가 가장 근원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자아와 세계."
이런 구분은 어떤가?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는 있지만, 이 구분은 모든 것을 통틀어 가장 질적으로 다른 두 존재를 구분한다는 점에서 괜찮아 보인다.
고대의 현자들은 자아가 무엇이고, 세계가 무엇인지를 깊게 탐구했다.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준비 운동은 세계를 두 개의 근본 구조로 구분하는 것에 익숙해지기다. 자아와 세계. 이러한 구조화는 두개의 근본 구조로 세계를 나눈다는 측면에서 이원론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판단중지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선입견 멈추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는 눈앞에 드러나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실제로 당신은 태어나서 한 번도 그 색안경을 벗은 적이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선호하는 색안경의 브랜드가 있다. 한국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브랜드의 이름은 기독교, 불교, 과학, 자본주의, 유물론, 공리주의, 불가지론 등이다. 이슬람교, 힌두교, 공산주의 등의 브랜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점은, 모든 이가 취향에 맞게 색안경을 선택하지만 이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것은 색안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색안경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다.
아직 일원론에 대한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지만, 우선 당신에게 묻고자 한다. 쉽게 이해되는가? 많은 사람이 이러한 통합적 결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브르주아와 프로레타리아는 하나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하나다!' 쉽게 고개를 끄덕일수 있겠는가? 어떤 이들은 이처럼 모순되거나 상반되는 가치를 쉽고 단순하게 통합하고, 다른 이들은 이것이 가벼운 태도라며 분노한다. 우리도 일원론을 다루기 전에 주의해야 한다. 일원론은 여러 사상, 종교, 학문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비상식적이고 초월적인 결론으로 토론과 논쟁의 가치를 훼손할 수도 있다.
1. 우주 : 세계의 탄생
우주의 탄생 - 왜 인간은 우주를 이해하려 하는가
"빛이 있으라."
그리고 세계가 탄생했다.
당신이 이러한 우주 탄생의 기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 기록을 신뢰한다. <구약> 성서에 기반하고 있는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인구가 전체 인류의 54% 정도가 되니 말이다.
종교적 설명에 거부감이 큰 사람들, 혹은 정규 교육을 통해 과학을 접한 사람들은 <창세기>보다는 빅뱅 이론에 더 친숙하다. 빅뱅 이론은 우주가 먼지보다도 작은 매우 압축된 상태에서 대폭발과 함께 지금의 크기로 팽창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처음 빅뱅 이론이 등장했을 때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1927년 벨기에의 천문학자 조르주 르메트르가 대폭발 이론을 제안했을 때 과학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가 로마 카톨릭 사제였던 동시에, 그의 이론이 근대 이후 과학이 그토록 몰아내고자했던 기독교의 그림자를 다시 불러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빛이 있으라." 빅뱅 이론은 어쩐지 <창세기>를 연상시킨다.
인류의 절반 이상이 <구약>을 신뢰하는 상황에서, 우주가 빛의 폭발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이론은 대중의 패러다임 안에서 수용될 수 있을 만한 설명이었던 것이다.
종교인들은 안심했다.
빅뱅 이론은 이러한 불안을 해소해주었다. 이제 신은 현실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 신은 빅뱅 이전에 존재하며, 빅뱅을 일으킨 최초의 원인자로서 충분히 기능한다.
인간은 누구나 우주의 시작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과학자든 종교인이든, 혹은 이와는 무관한 보통의 사람들이든, 우리는 한 평 남짓의 공간에 앉아 우주의 탄생과 종말, 팽창과 수축을 상상한다. 도대체 왜일까?
가장 심오하고 초월적인 답은 이 정도일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자기반성 과정이다."
자기반성은 스스로와 대면하는 사유 과정을 말한다. 마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유의 출발점이자, 최소 조건이 된다. 당신이 사유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객관적 대상으로 마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주는 138억 년의 시간 동안 깊은 침묵 속에 있었다. 하지만 어느 때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우주가 자기 안에 우주에 대해 사유하는 존재, 즉 인간을 잉태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었다.
시간 이전의 시간 - 다중 우주와 평행 우주
우주 너머의 우주 - 우주가 여러 개라는 몇 가지 모델
차원에 대하여 - 0차원에 대한 상상
다중 우주론이 해결하는 문제 - 우주가 하필 지금의 모습인 이유
인간 중심 원리 - 우주의 존재 이유와 인간
2. 인류 : 인간과 문명
우리 우주의 시작 - 어떻게 빅뱅 이론을 증명했을까
답부터 말하면 그것은 관측 장비의 발달과, 이로 인해 얻게 된 다양한 자료들, 이를 바탕으로 한 논리적 추로에 의해 가능했다. 그 시작은 1929년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의 천체들을 관측하며 얻게 된 정보였다.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천체가 적색편이 현상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색편이 현상이란 생각보다 단순한 개념인데, 관측자를 기준으로 멀어지는 물체의 색깔이 조금 더 붉게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그것은 멀어지는 속도만큼 방출되는 빛의 파장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관측자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물체는 푸르게 보이는가? 맞다. 다가오는 속도만큼 빛의 파장이 짧아질 것이므로 관측자에게 더 푸르스름하게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청색편이라고 부른다. 더 쉽게 설명하면 빠르게 다가와서 나를 지나 빠르게 멀어지는 구급차의 소리를 생각하면 된다. 가까이 다가올 때는 파장이 짧아지며 점차 높은 소리가 나고, 멀어질 때는 파장이 늘어지며 점차 낮은 소리가 난다. 빛의 파장도 이와 동일하다.
물체의 적색편이와 청색편이 현상은 ‘도플러 효과’라는 이름으로 과학계에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물론 허블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우주를 관측하기 전에도 천체들이 도플러 효과를 나타낼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다만 적색편이와 청색편이는 무작위로 관측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다른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허블도 우주가 정적인 공간이라 믿었고, 천체들은 이 정적인 공간 속을 이리저리 떠다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천체는 다가오고 다른 천체는 멀어지며 무작위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 관측 결과는 상식적인 예상을 빗나갔다. 수많은 천체는 어떤 예외도 없이 모두 적색편이만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천체일수록 적색편이는 더 강하게 나타났다.
대답은 둘 중에 하나다. 첫째, 알고 보니 지구가 정말 우주의 중심이고 다른 모든 천체가 중심인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둘째, 어떠한 중심도 없는 우주 전체가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 답은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고는 코페르니쿠스 이후 400년 동안 과학이 종교로부터 힘겹게 지켜낸 우주관이 아니던가.
허블의 상상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우주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팽창하고 있다면, 만약 그 시간을 뒤로 돌리면 어떻게 될까? 천체들의 거리는 과거로 갈수록 점차 가까워질 것이다. 아주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물질의 거리는 매우 가까워지고, 결국 뜨겁게 뭉쳐질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0의 시간에 이르면 우리 우주 전체는 아주 작은 공간 안에 극도로 압축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야 이곳에서 눈뜬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우주의 시작, 빅뱅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38억 년 전, 매우 압축되어 있던 시공간의 에너지와 물질이 거대한 폭발과 함께 팽창하며 현재의 우주가 되었다고 알려진 이 사건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철학적이다. 그것은 이 사건이 시간적으로는 ‘0초’에 시작되었고, 공간적으로는 크기를 갖지 않는 ‘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질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물론 다중 우주론은 그 이전에도 우주가 존재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시작은 빅뱅인 것이 사실이다.
빅뱅 이후의 역사 - 0초부터 138억 년까지
우리 우주의 크기 - 너무도 큰 공간 속 너무도 작은 존재
지구의 탄생 - 충돌과 동반자 그리고 지질 시대
생명의 탄생 -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생명의 시작.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나 복잡한 일이다.
실제로 우리는 최초의 생명에 대한 문제는 고사하고, 지금 눈앞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이 어떻게 생명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기 곤란하다. 우리는 생명과 생물에 대해 너무 많은 질문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를 생물이라 말하고 어디까지를 무생물이라고 말해야 하는지, 생명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지 아니면 반드시 부모를 가져야만 하는지, 부모를 가져야 한다면 생명의 시작은 수정 전부터인지 아니면 수정 후의 사건인지,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이 어려운 문제에 답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과학자가 관심을 가져왔고, 특히 유기물로부터 생명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져왔다. 이를 화학적 진화론이라고 한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가 단백질, 핵산과 같은 유기물을 필요로 하고, 동시에 생명 활동의 과정에서 유기물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근거했다.
화학적 진화론의 첫 번째 문제는 과도한 논리적 도약에 대한 것이다. 화학적 진화론은 물질부터 생명까지의 진화 단계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중간 어딘가에서 질적인 도약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긍금한 것은 복잡한 무기물에서 복잡한 유기물이 합성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복잡한 유기물에서 질적으로 너무나 다른 생명으로의 커다란 도약이 발생할 수 있는가다. 화학적 진화론은 아쉽게도 우리의 본질적인 질문인 '어떻게 생명이 발생했는가?'에 대해서 어떠한 대답도 내놓지 못한다.
생명 기원의 메커니즘이 선명히 밝혀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와는 무관하게 38억 년 전의 어느 날, 모든 생명의 공통 조상이 지구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최초의 조상은 매우 보잘것없고 단순한 원시 세포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탄생은 지구뿐 아니라 이 우주에서도 매우 중요한 이벤트였다. 비로소 우주는 거대한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물질뿐이던 우주의 한 지점에서 처음으로 물질로 완벽히 환원할 수 없는 매우 특이한 무언가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 특이한 무언가가 진화해가며, 우주의 역사는 우주를 인식하는 생명의 관점으로 다시 쓰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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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다 : 우주와 자아
위대한 스승들 - 왜 그들은 축의 시대에 등장했는가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축의 시대’라 불리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축의 시대는 인류 정신사에 거대한 전환점이 된 시대였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와 고타마 싯다르타가 등장했고, 중국에서는 노자와 공자가 활동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태어났다.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 공통적으로 위대한 스승들이 거대 사상을 설파했는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바로 앞선 시기가 세계 각지에서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 증가를 겪은 격동의 시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도시 생활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좁혔고, 경제, 정치,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켰으며, 이는 폭력과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어쩌면 초기 시대는 처음으로 문병을 일으키고 그로 인한 문제에 직면한 인류가 필연적으로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사유의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축의 시대에 탄생한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은 인류를 보호하며 2500년의 시간을 이어져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은 희미해지고 본질은 사라졌다. 19세기에 이르러 등장한 과학주의 담론과 실증주의 철학은 오래된 가르침을 대체하며 서구 제국주의와 함께 빠르게 확산되었다. 세계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물질적 풍요에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그 결말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냉전 그리고 물질 중심의 시장경제였다. 21세기의 기술 발전과 함께 등장한 대중매체와 소셜 미디어는 말초적인 욕망을 쏟아내며 우리에게 말한다. 질문을 멈추라. 생각을 멈추라. 다만 소비하는 노동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 우리는 다시 혼돈 속에 던져졌다.
첫 번째 가르침은 고대 인도에서 시작한다.
역사적 배경 - 우리가 모르는 세계의 절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스스로를 아리아인이라고 불렀던 민족의 이주로부터 시작한다.
아리아인이 인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손에는 <베다> 가 있었다. '베다'는 산스크리트어로 지식, 지혜, 앎을 말한다. 종교적이고 신화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인 방대한 양의 문헌으로,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오래된 문서 중 하나다. <베다>는 시작도 없고 저자도 없는 경전이라고 말해진다.
아리아인이 <베다>를 중요시했던 건 그들의 세계관 때문이었다. 그들은 세계에 대해 하나의 거대한 순환적 모형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 신, 사제, 인간이 서로 물고 물리는 인과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신들은 우주의 원리를 지배했다. 그들은 서로 겨룸으로써 승리하거나 패배했고, 그 결과로 자연의 질서나 무질서가 발생했다. 그러니 인간은 질서를 유지하는 선한 신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그때 등장한 존재가 사제였다.
매우 세밀하고 정교한 제사와 의례 활동을 통해 신들을 돕고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어떻게 위대한 브라만이 적극적으로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한단 말인가? 해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신들을 쥐락펴락하는 사제들은 고맙게도 돈에 움직여주었다. 즉, 브라만을 움직이는 건 보통의 인간이었다.
고대인의 세계에서는 신이 월등하게 위대한 존재이고 인간은 보잘것없는 부속물이 아니었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해야 했다. 그럴 때 질서가 유지되고 우주와 삶이 지속될 수 있었다.
베다의 신화 - 신에 대한 세 가지 구분
일원론의 시작 - 고대 인도인이 찾은 궁극의 지혜
<우파니샤드>는 <베다> 의 방대하고 복잡한 내용 중에서 핵심이 되는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했다.
서양 사상사의 위대한 지성 쇼펜하우어가 라틴어로 된 <우파니샤드>를 가까이 두고 습관적으로 읽고 연구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우파니샤드>의 탐구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료하다. 핵심은 세 가지로, 전체로서의 '세계', 부분으로서의 '자아', 그리고 이 둘의 '관계'다. 세계, 자아, 관계. 이것이 <우파니샤드>가 탐구하는 분야다.
우선 전체로서의 ① 세계는 브라흐만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아외부의 세계,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말한다. 우주와 물질, 시간과 공간, 사회와 제도, 인간과 동물부터 초월적 능력을 가진 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아우른다.
② 자아는 아트만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아 내면의 세계, 내 안으로 펼쳐진 모든 것의 근원을 말한다.
<우파니샤드>는 이원론에서 멈추지 않고, 과감하게 한발을 더 내딛는다. 서로 달라 보이는 두 개의 근원이 사실은 하나라고 선언함으로써 세계와 자아의 ③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즉,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하나다. 이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라고 한다.
범아일여의 현대적 의미 - 자아, 세계 그리고 관계
범아일여는 오늘날의 인문학이 다루는 세 가지 주제를 모두 담고 있다. 우선 ‘범’, 브라흐만은 세계 전체를 의미하므로 오늘날의 의미에서는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응한다. 다음으로 ‘아’, 아트만은 자아를 뜻하고 오늘날의 ‘자아는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응한다. 마지막으로 ‘일여’는 오직 하나라는 뜻이므로 ‘세계와 자아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응한다.
나는 무엇인가
자아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해보자.
당신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회적 역할
생물학적 관계
나의 신체
만약 나에게 다리가 사라진다면 혹은 시각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더이상 내가 아닌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과 무관하게 나는 남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나의 정신은 어떤가?
나의 지능, 나의 기억, 내가 사용하는 언어 능력, 심리적 욕망 등.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것들도 본질적인 자아라고 할 수 없다.
이제 옆에 쌓아놓았던 나의 껍질 무더기를 바라보자. 자아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쌓여 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거기에 있느가? 당신에게 남은 건 무엇인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뿐이다. 당신의 1인칭 관점, 무엇인가를 보는 자, 바로 그 자리에서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능력, 관조하는 무엇, 다시 말해 텅 빈 의식만이 남아 있다.
이 의식은 특정한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능력이다. 즉, '내면을 경험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자아의 순수한 본질적 상태다. 고대 인도인은 자기 내면의 이 투명한 의식을 아트만으리 부른 것이다.
세계란 무엇인가
자아의 본질이 의식임을, 하나의 투명한 의식 능력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계의 실체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갖게 된다. 즉, 자아는 하나의 등불이고 세계란 그저 그 등불이 비추는 범위임을 알게 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사유의 전환을 가져온다. 이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자아다. 등불이 고정된 세계 위를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등불의 범위 안에 세계가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전환은 서양 철학에서도 이루어졌다. 이를 관념론이라 한다.
우리 머릿속에 준비한 구를 투명한 수정구슬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수정구슬은 나의 마음 혹은 의식으로, 유일한 실재다. 세계는 그 수정구슬 안에 왜곡되어 비치는 이미지다. 그렇다고 할 때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세계를 본다는 것은 언제나 내 마음이 그려낸 이미지로서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내 마음은 그저 내 마음을 본다. 이러한 세계관은 상식적이지 않다. 관념론에 따르면 진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마음, 의식, 관념일 뿐이다. 내 앞의 세계는 그저 하나의 거대한 가상이다. 그래서 인도인은 이 세계를 환영이라는 의미의 '마야'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진짜 세계는 무엇일까? 고대 인도인은 마야 너머의 실체를 상상했다. 하지만 그 실체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물질적 세계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주적 의식을 사유하고자 했고, 이 상상할 수 없이 심오한 존재에 일단 브라흐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계와 자아의 관계는 무엇인가
고대 인도인은 자아와 세계의 미분리를 이해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그들은 자아의 의식이 우주의 의식과 다르지 않음을 내면으로의 침잠 속에서 깊게 체험했다. 무한한 우주로 향하는 출구가 자기 내면에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사회적 영향 - 내면을 탐구하는 자들의 시대
우파니샤드의 문제 - 모든 종교가 갖게 되는 고민
바가바드 기타 - 세속과 탈속의 화해
힌두교의 세계관 - 인도 정신의 종합
최종정리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탄생한 위대한 스승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내면 안에서 우주를 발견하고자 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이 단일한 주제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다수의 고전으로 남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인이 고전을 읽어내는 것을 힘들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쩌면 당연하다. 그것은 고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 단일한 주제에 대해 너무도 낯설어하기 때문이다. 고전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필요한 건 많은 지식이 아니라, 그 고전이 발 딛고 있는 세계관에 대한 선(先)이해다.
우리가 《베다》에 대해 알아본 이유는 인도 종교에 대한 세부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수많은 고전의 세계로 자유롭게 여행하기 위해 내면의 세계관을 넓히는 것이다.
4. 도가 : 도리와 덕성
역사적 배경 - 신화와 역사의 경계는 어디인가
노자의 생애와 사상 - 탈속의 철학자
노자의 사상은 '도'라는 말로 집약된다. 이 말은 21세기의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도 일상에서 심심치 않게 듣는 말이다.
우리는 이 말을 익숙하게 사용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노자에 따르면 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고,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은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굳이 이 말의 의미를 설명해보면, 그것은 우주의 질서라고 할 수 있겠다. 우주 만물의 실체 또는 그 실체를 이루는 근본 이치가 도인 것이다. 잠시 머릿속에 그려보자. 나를 포함한 우주 전체를 말이다. 우리는 앞서 우주에 대해 충분히 다뤘으니, 초차원의 시공간에서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수많은 미니 우주의 거대 집합을 상상해도 좋을 것이다. 너무나 아득하지만, 우선은 도가 그러한 우주의 실체와 우주가 운행하는 근본 원리를 말한다고 생각해두자.
이번엔 ‘덕’에 대해서도 감을 잡아보자. 덕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단어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덕을 쌓다, 덕을 베풀다, 인덕이 훌륭하다 등등. 하지만 이 말도 마찬가지로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당신은 지금까지 이 말을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며 사용해왔는가? 덕은 영어로 ‘De’, 혹은 ‘Inner power’, ‘Inherent character’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우리처럼 서양인도 덕이라는 단어를 내면의 힘이나 본래의 성격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덕을 자기 내면의 질서 혹은 내면의 본질 정도로 기억해두자.
노자의 말대로 도와 덕이 애초에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때, 다양한 번역과 해석은 나름의 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테다. 다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속에서도 놓쳐서는 안 되는 핵심 요소가 하나 있다. 그것은 둘의 연결성이다. 즉, 덕의 의미는 도의 의미 안에서 확정될 수 있다. 도가 우주의 법칙과 질서라고 한다면, 덕은 그러한 도의 본질이 반영된 인간의 마음이다. 노자는 인간의 근본 심성이 우주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노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우주 전체로서의 도, 다른 하나는 자아의 본성으로서의 덕. 그리고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노자는 이 두 가지를 연결한다. 도 안에서의 덕, 덕 안에서의 도. 자아 안에서 우주의 질서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도덕경의 내용 - 우주의 질서와 내면의 질서
노자와 공자의 만남 - 두 가지 삶의 태도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세속의 철학자
논어의 내용 - 인간 사이의 실천 덕목
공자 이후 - 유학의 발전
공자와 노자의 차이 - 혼란을 멈추는 방법
외래 종교의 유입 - 불교의 등장
신유학의 세계관 - 일원론으로의 귀결
5. 불교 : 자아의 실체
역사적 배경 - 불교는 어떻게 아시아에 영향을 미쳤나
결과적으로 보면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사문 학파들이 자취를 감춘 것과는 다르게 유럽과 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며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깊은 영감을 준 것일까? 자기 삶의 불안 속을 걸어가고 있는 이들에게 붓다는 어떤 가르침을 설파한 것일까?
싯다르타의 생애와 사상 - 출가와 깨달음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고, 내딛는 작은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올랐다. 아기는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을 내려 땅을 가리켰다. 그리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쳤다. 이 말은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 이 세상이 모두 괴로움에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하리라’라는 뜻이다. 싯다르타의 정확한 출생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인도 문화에서는 문자나 기록을 남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설이 있지만 대략 기원전 6세기 무렵으로 본다.
고타마 싯타르타는 특정한 개인의 이름이다. 우리가 아는 기원전 6세기 네팔 지역에서 태어난 현자를 지칭한다. 고타마는 성, 싯타르타가 이름이다. 싯타르타라는 이름은 아버지 슈도다나 왕이 지어준 것으로 '모든 것을 성취한 자'라는 뜻이다.
싯타르타는 생각했다. '무엇이 이 세상의 괴로움을 끝나게 하는가? 그의 마음속에는 고통에 처한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과 이를 해결해야겠다는 열망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욕망을 끊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그의 깊은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이루었다. 명상에 잠긴 지 7일째 되던 날, 그는 드디어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은 자, 붓다가 되었다. 12월 8일의 이른 새벽. 그의 나이 35세 때의 일이었다.
불교는 인도 문화권과 동아시아 문화권의 사상적 연결고리다. 인도 지역에서 탄생하여 베다의 세계관 안에서 길러졌지만, 인도에 정착하지 못하고 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가, 유가 사상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동아시아인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불교는 기원전 5세기 무렵에 네팔 지역에서 탄생한 고타마 싯다르타를 기원으로 한다. 후에 붓다가 된 그는 세계와 자아에 대한 독특하고 심오한 철학을 전개해나갔다.
그의 사상은 사성제와 팔정도로 압축된다. 사성제는 고집멸도의 네 가지 진리로, 1)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를 직시하고 2) 고통의 원인으로서의 무명과 갈애를 이해하며 3) 갈애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고 4) 이러한 열반에 이르는 길로서 팔정도를 실천함을 말한다. 여기서의 팔정도는 여덟 가지의 바른 행위와 생각으로, 그 본질은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의미한다.
이 외에도 우리는 불교의 주요 개념으로서 연기와 오온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두 개념은 세계와 자아에 대한 불교의 기본 세계관이다. 연기는 세계의 실체에 대한 설명으로, 모든 현상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개념이다. 이에 따르면 모든 세상 만물 중에서 홀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소멸하여 이것이 소멸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실체에 대한 관점으로 이어진다. 자아라는 존재도 이러한 연기의 결과로 잠시 뭉쳐진 존재일 뿐이다. 붓다는 자아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단지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의 임시적인 무더기일 뿐임을 밝혀낸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는 다섯 가지의 무더기라는 뜻으로 오온이라 불린다. 이에 따르면 세계나 자아에 고정 불변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상정하는 믿음은 허상일 뿐이다. 붓다는 세계와 자아의 실체를 무상과 무아로 정리한다. 우리가 이러한 진실을 선명히 직시할 때에야 집착에서 풀려나고 비로소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가치,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묶어 삼법인이라고 한다.
불교가 다른 철학이나 종교와 달리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는 이유는 자아에 대한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자아에게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무아설은 일반적인 철학이나 종교 사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불교 고유의 사상이다. 이러한 특징은 같은 인도 지역에서 태어난 《베다》 와 불교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지점이다. 《베다》 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아트만을 상정하는데, 이를 자아가 있다는 의미에서 유아설이라 한다. 반면 불교는 자아의 실체는 연기와 오온의 임시적 결과물일 뿐 고정되고 불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아설을 설파한다.
세계와 자아에 대한 불교의 독특하고 심오한 관점은 이후 여러 분파와 학파로 분화되며 깊이 탐구되었다. 우리는 그중에서 대승불교를 따라가며 그 속에서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을 발견해보려 한다.
최종정리
우리는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을 탐구하는 여정에 있다. 여기서의 거대 사상이란 다양한 지역과 역사 속에서 탄생한 보편적 가르침이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세계와 자아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으로, 그 결론은 일원론, 즉 ‘세계와 자아가 그 근원에서 분리되지 않는다’였다.
붓다 초기의 가르침과 이후 등장한 대승불교의 중관파와 유식파의 사상을 살펴보며, 독립해서 존재하는 세계나 자아를 인정하지 않고 자아의 내면 안에서 세계의 실체를 이해하려는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을 알아보았다.
6. 철학 : 분열된 세계
유럽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둔다. 이 오래된 문명은 다섯 단계로 구분된다. 에게 문명, 암흑기, 고졸기, 고전기, 헬레니즘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중에서 고전기까지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라고 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시기가 바로 이 그리스 고전기다.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의 이 짧은 기간을 전후로 수많은 도시국가가 발달했고, 특히 패권을 장악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협력과 대립을 반복하며 공존했다. 기원전 5세기 무렵의 페르시아 원정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아테네는 경제, 정치, 문화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아테네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키며 아테네는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탄생했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아테네의 광장에서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던 그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적절한 질문과 대답을 통해 대화 상대자가 내면에서 스스로 진리를 정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제자들이 스파르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정치적 문제에 휘말려 재판을 받게 되었고, 자신의 이성적인 신념에 따라 독배를 비웠다.
소크라테스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플라톤은 아테네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정치에 대한 꿈을 접었다. 이후 아카데미아를 세워 후학을 양성했으며, 이데아 사상을 제시함으로써 2천 년 동안 서양 사상의 근본이 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데아 사상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불변의 이상 세계인 이데아 세계가 실재한다는 세계관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데아 세계를 설명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데아 세계와 현실 세계의 관계는 사물과 그림자의 관계와도 같다. 즉, 플라톤에게 현실 세계는 단지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일 뿐이다.
플라톤 이후의 서양 사상은 그의 세계관 안에서 성장했다. 서양인은 세계, 자아, 그리고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플라톤의 사유 방식을 공유했다. 우선 세계는 두 가지 세계로 나뉘었다. 그것은 완전한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 세계와 불완전한 현실 세계였다. 다음으로 자아는 두 가지 자아로 나뉘었다. 그것은 불멸의 영혼과 필멸의 육체였다. 마지막으로 자아와 세계의 관계 역시 둘로 나뉘었다. 이제 인간은 모든 것의 주인이자 인식의 주체가 되었고, 외부 세계로서의 자연은 주체에 의해 탐구되고 개발되는 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원론적 세계관의 탄생이다. 이원론은 대립하고 독립되어 있는 두 항을 설정하는 태도로, 서양의 사상과 문화의 기본 틀이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이원론이 단순히 세계를 분절하는 것을 넘어, 하나의 항이 다른 하나의 항에 폭력과 억압을 가하게 된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의 자각과 극복은 서양에서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특히 칸트의 관념론은 비범한 결론을 통해 이분화되어 있던 자아와 세계를 통합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이원론을 극복하고 일원론의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그 비범한 결론이 무엇인지 알아볼 차례다.
최종결론
우리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동양과 서양의 사상적 차이를 살펴보았다. 동양의 사상은 고대에 시작된 일원론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었다. 《베다》 와 도가와 불교는 자아와 세계의 분리되지 않는 깊은 관계성에 주목했다. 다만 근현대 이후 동양인은 이원론적 사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상사적 변화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였다. 유럽의 제국주의는 인도와 동양을 식민지화했고, 우리는 강제적인 동시에 자발적으로 서양의 세계관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는 동양인으로 태어난 모범적인 서양인이 되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가 그들의 세계관을 받아들였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이원론적 사고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상식적으로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고, 세계와 세계를 분리하며, 세계에 대한 실재론적 태도를 갖고 있다.
반면 서양 사상사의 방향은 동양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고대에 시작된 서양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철학과 종교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근대까지 이어졌다. 이원론과 로고스 중심주의로 정의할 수 있는 플라톤주의는 자아와 세계를 분할함으로써 주체가 대상을 교정하고 교화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의 비극이 되었다. 인간, 서양, 백인, 남성, 이성으로 상징되는 주체는 자연, 동양, 유색인, 여성, 신체로 상징되는 대상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진행한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 끝나고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인류는 플라톤주의의 근원적인 문제점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원론을 대신할 다원론의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정치, 사회, 문화, 예술, 철학 등 각 분야에서는 억압되어왔던 대상들의 지위가 복원되고 있다. 이것은 탈근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하나의 거대한 다원주의적 흐름으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실천적인 움직임에 앞서 사상적인 탐구는 이미 깊게 진행되고 있었다. 18세기, 칸트는 초월적 관념론을 제시함으로써 2천 년 동안 이어져오던 자아와 세계의 분리라는 이원론의 전통을 극복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인식 주체를 세계의 중심에 세웠고, 세계를 인식 주체의 내면에 드러나는 현상으로 정립했다. 인식 주체는 수동적으로 외부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선천적인 인식 능력을 통해 인식 대상에 색을 입히고 정리하여 능동적으로 세계를 그려내는 존재였던 것이다. 칸트 이후 근현대의 서양 철학사는 이원론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아와 세계를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정리하면, 동양의 세계관은 고대의 일원론으로 시작해 근현대에 그것을 잃어버리고 서양의 이원론을 받아들인 반면, 서양의 세계관은 고대의 이원론으로 시작해 근현대에 이르러 일원론적인 탐구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일원론적 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남은 것은 철학과 함께 서양 사상의 양대 뿌리가 되는 기독교다. 우리는 이 마지막 장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역사적 측면에서의 탄생 배경과, 사상적 특징으로서의 이원론, 그리고 이원론에 대한 대안이 기독교 교리 안에서 수용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볼 것이다.
7. 기독교 : 교리와 신비
서양 사상의 거대한 줄기를 이루는 기독교의 탄생을 살펴보기 위해, 세 가지 측면에서 역사를 알아보았다. 첫째 세계사적 배경에서 로마 제국의 역사, 둘째 이러한 전체 맥락 속에서 진행된 유대 지역의 역사, 셋째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위대한 스승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
이야기는 고대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된 로마 왕국은 기원전 6세기 공화국 시대에 이르러 안정된 정치 체제를 기반으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이뤄냈다. 이후 기원전 3세기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꺾고 지중해 서부를 장악한 로마는 거침없이 주변 지역을 점령하여 결국 오늘날의 유럽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공화국 말기에는 카이사르가 등장하여 1인 독재를 꿈꾸며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쳤지만, 귀족들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에 반대했던 모든 반란 세력을 처단하고 스스로 황제에 등극함으로써 로마는 제국 시대를 맞이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14년까지 재위했고,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의 변방이었던 식민지 유대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되었다.
유대인은 오랜 시간 유대 지역에서 살았다. 기원전 11세기에 사울에 의해 건국된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왕 이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었다. 이 중에서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에 멸망했고, 남유다 왕국은 기원전 6세기에 신바빌로니아의 침입으로 무너졌다. 이후 페르시아가 유대 지역을 점령하고 유대인의 자치를 허락하면서 그들은 바빌론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기원전 63년이 되면 지중해를 빠르게 장악해나가던 로마 제국에 의해 이 지역은 또다시 점령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기원전 4년 전후로 탄생했다. 당시의 유대인은 오랜 시간 동안의 식민 지배와 노예 같은 삶을 견디며 고대부터 전해져온 메시아 사상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을 치유하며 이 땅에 도래할 신의 나라를 말하는 예수는 많은 유대인에게 메시아로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과 당시 유대 민중의 관점이다. 로마 제국의 지배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속에서 일상의 고단함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삼십 대의 젊은 예수는 어떤 인물로 비쳤을까? 갈릴래아 호수 북쪽의 낮은 언덕 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설파하는 그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확실한 것은 그와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예수의 입에서 나온 삶에 대한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되었고, 이를 통해 그리스 철학과 연결되는 접점을 갖게 되었다. 지금부터는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려 한다.
최종정리
서양의 사상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즉 철학과 기독교를 근본 뿌리로 한다. 이 두 사상은 일반적으로 대립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본질에서는 이원론의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2천 년의 역사 동안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어올 수 있었다. 이번 장에서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집중해보았다.
첫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추상화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열정적인 사도였던 바울의 사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절대자와 관계 맺기 위한 필연이라는 보편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바울의 역할이 400년 전 플라톤의 역할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사유 속에서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단지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진리와 관계 맺은 자가 처하게 되는 보편적인 사건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바울의 추상화와 일반화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졌다. 장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지위가 구체적 개인에서 초월적 보편으로 격상되었다는 점이다. 로마 제국의 작은 식민지 유대 지역에서 활동한 예수는 바울을 통해 지역적 한계를 넘어 인류 보편의 존재로 확장될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반면 단점은 그러한 해석으로 현실에 발 딛고 살아 숨 쉬는 가르침을 설파했던 예수의 혁명적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가려졌다는 점이다.
교회는 바울의 사상을 토대로 성장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신과의 관계를 매개하는 보편자가 되었다. 반대로 인간은 신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신과 인간은 분리되었고, 천국과 지상도 분리되었으며, 영혼과 신체, 선과 악, 금욕과 쾌락도 마찬가지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기독교 교리는 4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플라톤의 이원론과 만나며 체계화되고 세련되어졌다. 이원론의 세계관 안에서 종교와 철학은 접점을 찾았다.
이원론은 오랜 시간 서양을 지배했다. 특히 서양 철학이 근대에 이르러 일원론의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과는 달리 기독교는 이원론을 유지했다. 이를 통해 신의 완전무결함은 불완전한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절대적으로 보전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일원론적 측면에 대한 탐구가 있었다. 우리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기독교 신비주의를 통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로써 일원론의 사유가 특정 지역과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의 모든 지역과 시대를 포괄하는 보편적 사유 방식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결론의 문 앞에 섰다.
에필로그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왜인가? 21세기 기술문명의 최전선에서 우리는 왜 이토록 오래된 고대의 지혜를 들춰보아야만 하는가? 우리는 왜 일원론의 세계관을 알아야만 하는가?
우선 실용적인 이유부터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고전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잡고 동서양의 고전을 펼친다 해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원래 고전이 어렵기 때문도 아니고, 학창 시절에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며, 철학과 인문학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실제 이유는 우리가 반쪽의 세계밖에 모른다는 데 있다.
우리는 이원론이라는 비좁은 섬 안에 머물고 있지만 인류의 위대한 고전들은 대부분 일원론의 거대한 대륙 위에서 탄생했다. 당신이 고전을 펼치고 그 안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내면 세계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는 일원론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당신이 일원론을 이해해야 하는 실용적인 이유다.
다음으로는 당신 인생에 대한 존재론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세계관’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슬픈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수감자라는 것을 모르는 수감자와도 같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세계관은 감옥이다. 감옥 안에 있는 자에게는 감옥 밖의 한 줌의 공간도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세계관도 마찬가지다. 세계관은 당신 내면의 감옥이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 세계관 안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며 죽는다. 그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조차 상상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태어나서 기독교인으로 성장하고 기독교도로 죽는다. 그는 한 번도 불교의 세계관에, 이슬람의 세계관에, 유물론의 세계관에 발을 디뎌보지 않고 자신의 세계가 전부라고 믿으며 눈을 감는다. 어떤 이들은 불교의 세계관에서 태어나 불교인으로 성장하고 불교도로 죽는다. 그는 한 번도 다른 세계관에 발을 디뎌보지 않고 눈을 감는다. 어떤 이들은 유물론자로 태어나서 유물론자로 죽고, 어떤 이들은 실용주의자로, 어떤 이들은 허무주의자로, 어떤 이들은 과학주의자로 태어나고 성장했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건 없다고 믿으며 눈을 감는다.
문제는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갖가지 느낌과 상념이 사실은 우리가 이원론의 세계관 위에 발 딛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갖게 된 것들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눈앞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도, 그래서 마음이나 정신은 소홀히 하고 눈앞의 물질 세계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세계와 자아를 독립된 실체로 느끼며 자신이 소멸한 이후에도 세계가 존속할 것이라고 믿는 것도, 그러니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덧없고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도, 나의 내면은 보이지 않으니 그 안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타인의 말에 휘둘리게 되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자아와 세계를 나누는 이원론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갖게 된 사유의 흔적들이다.
잃어버린 절반의 세계인 일원론의 세계, 그곳의 주인이 원래 당신이기 때문이고, 당신이 들어서기 전까지 그곳은 깊은 어둠 속에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외부의 폭풍을 가라앉히고 내가 가진 모든 선입견을 판단중지 한 후, 내면의 가려진 대륙을 향해 발을 내디뎌 보자. 고대의 위대한 스승들이 그 깊은 곳에 출구가 있다고, 그 출구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주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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