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962 미친생각
1963 성공할 수 있을까?
1964 자동차에서 신발을 판다
1965 자기자본 딜레마
1966 말보로 맨과의 전쟁
1967 신발에 미친 괴짜들
1968 나의 파트너, 팍스 나이트
1969 사장으로 산다는 것
1970 현금, 현금, 현금이 필요해
1971 부도 위기, 그리고 나이키의 탄생
1972 “우리의 방식, 아이디어, 브랜드로 승부합시다”
1973 프리폰테의 정신: 내일이 없는 것처럼 뛰어라
1974 오니쓰카와 결별하다
1975 돌려막기 인생
2부
1975 당신은 규정을 깬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1976 버트페어스: 나이키가 문제를 해결하는방법
1977 에어 쿠션, 스포츠스타, 미국판매가격
1978 급격한성장, 그리고 좌충우돌
1979 내부의 적과 중국이라는 기회
1980 결승선은 없다
A shoe dog is a footwear expert. The term usually refers to a person dedicated to designing and fabricating shoes—and selling them. ... Then, the most likely answer is: Phil Knight, the creator of NIKE, who recently published his memoir in a book with the title “Shoe Dog”
나이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고 가장 큰 스포츠 의류 회사입니다.
불과 50년 만에 한 남자의 더 나은 신발에 대한 꿈은 1,00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닌 글로벌 기업으로 변했다.
오늘은 나이키의 가장 이른 시대로 돌아가서 그 마법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들의 성공에 어떤 성분이 있었는지 알아내고자 한다.
그 해는 1962년이고 필 나이트는 스탠포드를 갓 졸업했다.
어떤 경영학 졸업생이 말할 수 있듯이, 좋은 아이디어가 없다면 기업가가 되는 것은 어렵지만 필은 좋은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 장거리 달리기 선수였고 그의 비즈니스 수업 중 한 곳에서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논문을 썼다.
필은 미국 시장에서 일본 카메라가 지배적인 독일 카메라를 대체한 경위를 보았으며, 일본 신발이 과연 푸마와 아디다스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 당시 미국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1962년 11월 그는 관광객처럼 일본으로 건너가 탐험을 시작했다.
아름다운 도시 고베에서 그는 그의 눈길을 끄는 신발가게를 우연히 만났다.
오니쓰카 타이거라는 회사의 것이었고 그들이 만든 신발은 (그들의 시간동안)이었다.
매우 높은 품질, 그래서 필은 그것들을 집으로 수입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을 미국 신발 유통업자로 내세우고 회사측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필은 그 자리에서 회사 이름을 지어 오니쓰카의 미국 대리점이 되겠다고 제안했는데, 놀랍게도 오니쓰카은 이를 받아들였다. 필은 자신감에 차서 미국 오니츠카 타이거의 독점 유통업체가 되었다. 그는 1963년에 타이거 신발 12켤레의 첫 번째 선적을 받았고, 그는 그가 운전할 수 있는 모든 런닝 트랙에서 자동차 뒤쪽에서 그것들을 팔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의 전략은 확장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아는 유일한 사람, 즉 전 오리건 대학교의 코치였던 빌 바워먼에게 갔다.
이제 빌은 그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코치 중 한 명이었다. 사실 그는 여러 명의 올림픽 선수들을 훈련시켰다. 그는 타이거 신발을 너무 좋아해서 파트너를 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1964년 1월 빌과 필은 블루 리본 스포츠를 통합했고, 각각 500달러를 거기에 투자했다.
그들은 한 켤레에 3.33달러인 그들의 첫 번째 주문에 그 모든 돈을 썼다. 그것은 신발 300켤레에 달한다. 그 선적은 1964년 4월에 완성되었고 빌의 연결 덕분에 7월까지 다 팔렸다.
그들의 첫 해에, 빨강색 큰 스위치고 그 돈으로 필 그의 회사에 영업 사원을 고용해서 시작했다 8천달러어치 신발을 팔았습니다. 1965년에 그들의 수입은 2만 달러로 증가했고 곧 그들은 산타 모니카에 그들만의 가게를 열었다.
바워먼은 혁신에 대한 모든 것이었고 오니츠카에서 오는 새로운 선적물마다 신발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기 위해 신발 몇 켤레를 잘라내곤 했는데, 예를 들어 쿠션을 더하거나 경량 재료를 더 사용함으로써 신발들을 늘 개선하려고 했다.
그는 끊임없이 일본에 변화를 요청하는 메모를 보냈다; 그는 오니츠카의 신발을 효과적으로 디자인하고 있었다.
BRS를 주류로 끌어올린 것은 빌의 디자인 중 하나였다.
코르테즈는 1968년 멕시코에서 열린 1968년 올림픽 덕택에 가장 잘 팔리는 신발 중 하나가 되었다. 코르테즈 덕분에 BRS는 1969년에 30만 달러어치의 신발을 팔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다. 코르테즈는 너무 성공적이어서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들이 새로 받은 모든 선적품은 이전보다 더 빨리 매진되었지만, 오니츠카는 계속해서 같은 빙하의 속도로 그들을 보냈다.
오니츠카가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우선 일본에서의 현지 수요를 충족시킨 다음 미국에 남겨진 것은 무엇이든 보내는 것이었다.
필과 빌은 확장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유통업자가 아닌 진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들이 모든 카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르테즈는 바워만의 디자인이었기 때문에 오니츠카와의 계약이 만료되자마자, 그들은 자유롭게 그것을 만들 수 있었다.
그들에게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계약은 뮌헨 올림픽 직전에 1972년에 끝날 것이다.
따라서 필은 그의 큰 움직임을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다.
1971년에 그는 브랜드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직원이 그리스의 승리의 여신 다음으로 나이키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 후 필은 로고가 필요했고, 그래서 그는 근처 대학에 가서 그가 찾을 수 있는 첫 그래픽 디자인 학생을 낚아채 그에게 로고를 만들라고 말했다. 그는 35달러라는 인상적인 액수로 이것을 받았다. 바로 그 돈이다.
돈을 잘 썼고 이제 그의 브랜딩이 완성되면서 필은 올림픽에 나갈 준비가 되었다.
이번에 필은 배타적 협정에 자신을 가두는 대신 일본 전역에 하청업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생산을 통제하고 있는 필은 마침내 날개를 펼 수 있었다.
이 그래프는 필이 일본 하청업체로부터 신발을 수입하기 시작했을 때 정확히 나이키의 판매량을 보여주는 그래프에서 볼 수 있으며, 1971년 계약이 만료되기도 전에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부터 나이키의 이야기는 성장의 하나가 되었다.
이들은 1989년 "Just Do It" 캠페인과 같은 뛰어난 마케팅과 결국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신인 선수들과 계약함으로써 미국에서 가장 큰 스포츠 의류 회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