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가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줄 10가지 생각
1. 우리가 그 자체를 위해 하는 것이 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2. 존엄성은 가격으로 따질 수도 없고 대체될 수도 없다(칸트)
3. 인간은 약속하는 동물이다(니체)
4. 자기란 관계 그 자체와 관계하는 관계다(키르케고르)
5. 진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진실할 수 있다(아렌트)
6.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은 그의 삶 무언가를 손에 쥐는 일이다(로이스트루프)
7. 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이다(머독)
8.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는 일이다(데리다)
9. 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이루어진다(카뮈)
10.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잊느다(몽테뉴)
1강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 우리에게 있는가_아리스토텔레스의 선
"우리가 그 자체를 위해 하는 것이 선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우리가 선해져야 하는 이유는, 첫째, 베풀 때 행복을 느낀다. 둘째, 베풀 때 우리도 받을 수 있다. 셋째, 다른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을 품게 한다. 넷째, 건강에 좋다. 다섯째, 베푸는 일은 전염성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게 만든다.
우리는 왜 선해져야 하는가
그는 세상 모든 것을 행복과 건강 같은 이득을 재는 저울로만 측정해서는 안되며, 이득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인간의 모든 활동은 어떤 선(좋음)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활동 중에는 목적이 그 활동 바깥에 있는 것도 있지만 활동 자체가 목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야 바로 선(좋음 그 자체)이겠지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술의 목적은 건강이고, 조선술의 목적은 좋은 배를 만드는 것이며, 군사학의 목적은 승리이고, 경제학의 목적은 부를 쌓는 것이다.”
행복과 덕의 상관관계
그 자체를 위해 몰두하는 활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주로 윤리적 행위라 부를 만한 쪽을 가리킵니다. 즉, 그가 생각하는 의미 있고 잘 사는 삶, 그리고 행복은 선한 행동을 하는 삶입니다. 선한 행동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행복의 핵심 요소입니다. 예를 들면,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돕는 일이 선한 행동인 이유는 그 일을 한 사람에게 부가 따르기 때문이 아니라 (물론 이런 결과들을 낳을 수도 있지만요) 그 행위 자체가 선하기 때문입니다.
효용성과 즐거움 같은 도구적 가치는 철학 용어로 표현하면 ‘우연적’인 것들입니다. 운이 좋다면 우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도구적 가치가 우정의 본질을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 성격을 정의하는 것은 오직 내적 가치, 또는 본질적 가치뿐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 학생이 하루에 45분씩 운동을 했을 때 학습 능력이 향상되는 것은 우연적 가치이지만, 우리가 몸을 움직이고 활동을해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훨씬 본질적인 것입니다.
주관주의는 틀렸다
우리는 그런 쓸모없는 활동에 시간을 쓰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요즘처럼 도구화된 시대에서는 그런 쓸모없는 활동이야말로 삶의 진짜 의미를 되찾아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쓸모없는 일을 하세요. 쓸모없음이야말로 최고의 선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하는 연습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건 별 뜻 없이 중얼대는 말이 아닙니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주관이나 취향도 아니고, 도구화를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도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말이니까요.
2강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가 있는 목적의 왕국_칸트의 존엄성
“존엄성은 가격으로 따질 수도 없고 대체될 수도 없다.” – 이마누엘 칸트
존엄성이란 무엇인가?
노르웨이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가 [나의 투쟁]의 1권 첫 부분에 담담하게 쓴 것처럼 말이지요. “심장의 삶은 단순하기 그지 없다. 힘이 다할 때까지 움직이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다 멈추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가장 대표적인 저서로는 초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지아노초 마네티의 [인간의 존엄성과 탁월함에 관하여]와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연설]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초기 인문주의자들은 존엄성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개념을 자기 사상의 주춧돌로 삼아 도구주의에 노골적으로 맞선 철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위대한 계몽주의 사상가 이마누엘 칸트입니다.
가격을 지닌 것은 언제든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칸트의 책 가운데 가장 짧고 쉬운 편에 속하는 [도덕 형이상학 정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적의 왕국에서 모든 것은 가격을 갖거나 존엄성을 가진다. 가격을 가지는 것은 무엇이든 동등한 가격을 지닌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반면에 모든 가격을 뛰어넘어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존엄성을 지닌다.”
칸트는 인간에게 내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주요 특징은 우리에겐 존엄성이 있다는 점이지요.
사람은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그 자체로 목적이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입니다. 칸트가 다소 난해하고 형식주의적인 방식으로 쓴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이성적 존재(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가 당신의 도덕법칙 안에서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심리학에겐 없는 철학의 쓸모
미국의 유명한 라이프 코치 토니로빈스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성공이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당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과 함께, 원하는 만큼 하는 것입니다.”
3강 지키지 못한 것들에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_니체의 약속
“인간은 약속하는 동물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약속은 왜 중요한가?
세 편의 독립된 논문으로 구성된 [도덕의 계보]의 두 번째 글에서 니체는 이렇게 묻습니다.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기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역설적 과제가 아닌가? 그것이 인간의 진짜 문제가 아닌가?”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니체의 사상을 되살려, 우리가 약속하고 이를 어겼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능력을 토대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죄책감은 주체가 되는 것을 가능케”
사회는 새로운 것을 좇고 일시적으로만 합의하는 문화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점점 더 일시적으로만 합의되는 일이 늘고 있지요. 우리는 서로 당분간 약속을 지킵니다. 어쨌든 약속을 하긴 하지만 더 나은 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유지하는 거지요. 더 좋은 모임, 더 좋은 일자리, 더 좋은 연인이 나타날 때까지만 유지되다가, 끊임없이 더 나은 것으로 대체하지요.
4강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_키르케고르의 자기
“자기란 관계 그 자체와 관계하는 관계다” – 쇠렌 키르케고르
쇠렌 키르케고르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덴마크 철학자입니다. 신학적이면서 철학적이고, 문학적이기도 한 그의 글은 풍성한 의미들이 복잡한 미로처럼 곳곳에 얽혀 있어서,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해석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인간은 정신이다. 그런데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자기다. 그러면 자기는 무엇인가? 자기란 관계 그 자체와 관계하는 관계다. 또는 그 관계 (자기를 구성하는) 안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것이다. 자기란 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는 (사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과 관계하는 방식
사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합니다.
도덕적으로 분노하거나 책임을 묻는 일은 오직 상대가 자신의 행동과 관계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타인이 우리를 만든다
발달심리학은 이러한 현상이 ‘근접발달영역’ (아동이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제 발달 수준과 어른이나 또래의 안내와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잠재적 발달 수준 사이의 영역)에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어른은 아이를 도와, 처음에는 도움을 받아야만 할 수 있던 일들을 혼자 힘으로도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자아는 틀렸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자기와 자기 관계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동물과 달리 항상 다른 존재를 인식하면서, 자신의 충동을 따를지 말지 반성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강 불확실한 세상에서 신뢰를 쌓는 방법_아렌트의 진실
“진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진실할 수 있다” – 한나 아렌트
사유하고, 세상을 바꾸고, 의미를 찾는 존재
뉴욕에서 아렌트는 중요한 사회 문제들을 연구하면서 거기에 철학을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아렌트가 제시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으로 ‘탄생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고 생명을 낳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간다는 것을 말하는 개념이지요.
[인간의 조건] 역시 보석 같은 책입니다. 이 책은 ‘활동적 삶’ 이라 부른 개념을 주로 다룹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이 세상에 다양한 방식으로 적응하는 활동을 세 가지로 나누었는데요. 기본적인 생물학적 필요를 충족하는 ‘노동’, 기술을 생산하는 ‘작업’, 문화 산물을 생산하는 ‘행위’ 로 각각 구분했습니다. 아렌트도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우리의 행위를 그 일을 하는 것 자체에서 충분한 의미가 나온다고 보았지요.
진화 심리학이 말하는 거짓말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인간은 진실할 수 있고, 신뢰할 만한 확실성이 없다 해도 인간은 신뢰 할 수 있다.”
위의 문장은 아렌트가 르네 데카르트에 대해, 그리고 종교의 중세 시대에서 과학과 이성의 계몽 시대로의 전환에 대해 다루는 부분에서 언급됩니다.
가치를 지닌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이자 스토아학파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마구잡이로 일어난다고 해서, 너 역시 마구잡이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사려 깊고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할 만한 거짓말을 수없이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상에서의 거짓말과 사회적 관계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쓰이는 거짓말은 차이가 있습니다. “거짓말은 우리가 사회의 계층을 오르도록 도움을 주며, (…) 경쟁에서 유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
진실을 통해 창조되는 것들
아렌트가 언급하는 진실은 실존적 진실입니다. 아렌트의 진실은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삶을 사는 방식에서 나옵니다.
6강 타인에 대한 나의 영향력을 점검하라_로이스트루프의 책임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은 그의 삶 무언가를 손에 쥐는 일이다” – 크누 아이레르 로이스트루프
우리는 왜 타인을 신뢰하는가?
로이스트루프는 윤리적 삶이 우리가 “과감히 앞으로 나가 만나게 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윤리적 삶은 개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누구도 철회할 권리가 없는 요구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삶이 이처럼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는 일”이며, 그것을 통해 “그 사람 삶의 무언가를 자기 손에 쥐게 되는 일”입니다. 이를 토대로 로이스트루프는 ‘윤리적 요구’라는 개념을 이끌어냅니다. 윤리적 요구란 바로 “당신에게 건네진 다른 사람의 삶을 보살피라는 요구” 이자 책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의존하며, 당시의 권력(힘)이 닿는 범위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의 삶의 일부를 돌봐야 한다는 요구는 사람 사이의 근원적이 상호 의존과 직접적인 영향력에서 생겨난다.”
손의 윤리학
로이스트루프는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개별적인 세계다’ 라는 관점에 도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의식의 철학’과 충돌합니다. 의식의 철학은 17세기 데카르트 이후 칸트를 거쳐 현대의 뇌 연구까지 이어지는 지배적인 생각입니다. 인간은 의식에 의해, 의식이 자기 바깥의 세상을 관찰하고 재현하는 능력에 의해 정의된다는 주장이지요. 과거에는 이런 특징이 영혼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에는 뇌의 기능으로 여겨지지요.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도구화의 흐름 속에서 그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장인의 일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장인의 일이 윤리의 토대로 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세넷은 장인을 그 일 자체를 잘하려는 욕망과 사명감을 가진 존재로 정의합니다.
7강 내가 아닌 존재에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 _머독의 사랑
“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이다” – 아이리스 머독
[도덕 지침으로서의 형이상항] 그는 또한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에 대한 책도 썼습니다.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
사르트르는 세상을 헐벗고 의미 없는 ‘즉자존재’와 인간의 의식을 가리키는 ‘대자존재’로 분리했습니다. 즉자존재란 무엇도 의식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있는 존재를 말하고, 대자존재란 대상을 의식하고 그렇게 의식하는 자기 자신도 의식하는 존재 방식을 뜻합니다.
이처럼 사르트르가 삶의 관점을 선택하거나 창조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 머독은 관점이 선택될 때보다 주어질 때가 많다고 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주어진 것을 인식하고 발견하는 일이지요. 머독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 주변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충분히 관심을 가진다면, 별다른 문제없이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러 관점을 통해 무슨 일이 옳은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무엇이 선인가?
'선의 주권'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철학 에세이의 제목으로 삼기도 했지요.
사랑할 때 꼭 필요한 것
머독의 소설은 사랑을 많이 다루는데, 이는 그의 철학에서도 주요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머독의 관점에서 사랑의 본질을 이해할 때, 결코 도구화될 수 없는 실존적인 삶의 관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머독에게 상당히 크고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그는 사랑을 이렇게 묘사하지요. "사랑은 개인의 인식이다. 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이다."
심리학자 옌스 마멘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을 구체적 실체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려면 머독이 말한 의미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이다"라는 문장 뒤에는 이런 구절이 이어집니다. "예술과 도덕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발견이다."
8강 불가능하기에 가능한 것_데리다의 용서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 - 자크 데리다
'어머니' 같은 단어는 그 자체로, 따로 떨어진 언어적 표현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아버지, 아이, 여자 등 다른 단어와의 관계망 안에서만 의미가 있지요. 개별 요소들은 이처럼 더 큰 구조 안에서만 의미가 있고, 텍스트 또한 콘텍스트(맥락) 안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표현의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표현 사이의 관계망을 상세히 조사해 나타내는 것이 구조주의 철학의 큰 과제였습니다.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철학자?
포스트구조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이 데리다를 불편하게 여기는 점이 바로 이지점입니다. 그의 철학을 대표하는 용어인 '해체'는 텍스트의 의미가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일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대안적 의미까지 제시하는 포스트구조주의 지적 운동을 일컫기도 합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특히 프랑스와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지요. 해체는 그 본질상 완결될 수 없고 영원히 이어지는 활동입니다. 데리다는 이런 특성을 무척 윤리적이로 정치적인 것으로 여겼지요. 사이먼 크리츨리에 따르면 데리다의 해체 개념은 기존의 진리와 우리 시대의 자아도취적 자아상과 적극적으로 싸우며 세상을 윤리적으로 읽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관계
"죄가 없는 곳에서는 용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 입니다.
우리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지요. 이런 현상을 철학 용어로는 '아포리아'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난처함'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왔는데요, 일종의 막다른 상태나 어려운 상황을 뜻합니다.
용서는 무조건적입니다. 왜 용서해야 하는지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유를 묻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용서를 도구로 만들어버리고, 그 의미 자체를 파괴하게 되니까요.
용서에 대한 데리다의 해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진정한 용서는 무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용서가 수단이 된다면 더 이상 용서일 수 없으니까요. 둘째, 용서할 수 없는 것만 용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윤리의 비대칭성
"윤리적 요구의 일방성은 바로 개인의 삶 역시 끊임없는 선물이라는 이해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우리가 실천하는 일의 보답으로 다른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
9강 어떤 순간에도 희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가_카뮈의 자유
"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이루어진다" - 알베르 카뮈
철학사에서 자유를 둘러싼 논쟁은 두 가지 지점에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자유의지를 둘러싼 논쟁입니다.
지키기 위해 싸울 가치가 있는 것
철학자 존 듀이는 사람들이 구체적인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경우는 많았지만, 형이상학적인 자유의지를 위해 싸우는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빵과 자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카뮈는 가치가 "사람이 타고난 인간됨에서 나온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치들이 반드시 구현되지는 않을지라도 인간 본성에는 어떤 영원하고 보편적인 가치가 있다"라고 생각했지요. 카뮈는 가치가 개인이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주한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이루어진다."
이 문장은 자유를 다룬 에세이 [빵과 자유] 에서 나옵니다. [저항, 반란, 그리고 죽음]이라는 다소 엄숙한 제목의 에세이집에 실린 단편이지요
[빵과 자유]는 시작부터 왜곡된 자유 개념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카뮈는 왜곡된 자유 개념이 두가지가 있다고 말하는데요. 하나는 냉전기 서유럽의 분위기와 연결된 서구 버전의 자유입니다. 그는 이런 자유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듭니다.
두번째는 동구 버전의 자유입니다.
소국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카뮈는 자유를 책임과 연결함으로써 적극적 자유를 사고하는 오랜 전통과 손을 잡았습니다. 여기서 적극적 자유란 자유에 내용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향한 자유지요. 이와 반대로 소극적 자유란 무언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의 일부인가
자유는 '자기-내면통찰'만이 아니라 '자기-외면통찰'이기도 합니다. 벌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많은 부분은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속한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감정이나 생각에 따라 결정된다."
카뮈는 자유의 내적 가치를 분명하게 옹호했습니다. 그는 행복과 복지가 보장된다면 자유는 없어도 된다는 생각을 거부했습니다. 카뮈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회가 갑자기 바뀌어서 모두에게 만족스럽고 편안한 곳이 된다 할지라도, 자유가 패배한다면 결국 야만이 될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 자유가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10강 내 삶의 노예가 되지 않는 방법_몽테뉴의 죽음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잊는다" - 미셸 드 몽테뉴
우리가 유한한 시간을 산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경험과 행동은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무심한 우주에서 가치가 생겨날 수 있는 좁은 문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덕이라고 말합니다.
요나스는 오로지 유한한 존재만 가치를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요컨대 '필멸성'이 '도덕성'의 전제 조건이 되는 거지요. "인간이 모두 죽는다는 걸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덕이야말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철학은 죽음을 위한 준비다
"철학은 본질적인 죽음을 위한 준비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철학에 정통한 사람들의 공부라는 게 죽음에 대한 탐구일 뿐이라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는 것 같네." 또한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올바르게 철학하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일을 위해 수련 중이고, 따라서 죽음을 누구보다 덜 두려워한다네." 소크라테스는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필멸성이 우리 삶을 형성한다. 삶에 일관성과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만든다. 동시에 우리가 죽어간다는 사실은 그 모든 것을 위협하기도 한다. 죽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아직은 절대 아니다." 이게 바로 죽음의 역설입니다.
불안과 자유
(몽테뉴에게) 철학하는 것은 입으로, 즉 우리가 말하고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는 것처럼 죽음을 배우는 일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소멸의 공포와 대면할 수 있다. 결국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덧없는 망각이나 불멸의 열망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죽음의 공포이기 때문이다.
몽테뉴에게는 이것이 자유의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몽테뉴는 자신의 죽음에 매혹되었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죽는 다양한 방식을 목록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하며 글을 끝맺습니다. 그러나 나의 목표는 죽음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동시에 사는 법도 가르칠 것이다."
죽음을 생각해야 삶의 주인이 된다
[더 행복해지려면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하라]
덴마크의 시인 리스비에르 톰센의 짦은 시를 소개하면서 이번 강의를 마무리 하려 합니다.
아마 어느 삼월 밤
한 순간이 지날 때마다
나는 조금 죽는다.
살아가는 내내
나는 죽음을 안고 다닌다.
비가 내리고 날씨가 풀리는 따뜻한
어느 밤, 아마 삼월에
나는 어둠 속으로 들어서고
죽어감을 멈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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