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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셀트리오니즘 : 셀트리온은 어떻게 일하는가 셀트리온은 어떻게 일하는가

by 욕심쟁이77 2021.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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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전예진

한국경제신문 기자. 서울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 생명공학공동연구원 바이오 최고경영자과정을 마쳤다. 입사 후 산업부, 정치부, 마켓인사이트부에서 일했다. 2017년부터 3년간 바이오헬스부 팀장을 맡아 제약바이오산업을 취재했다.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 SK바이오팜 등을 비롯해 화이자, 노바티스, GE헬스케어 등 글로벌 제약바이오 기업 CEO 100여 명을 인터뷰했다. 2018년 세계적인 생명공학 기업 머크의 창립 350주년 당시 국내 언론인 중 최초로 독일 본사에서 슈테판 오슈만 회장을 단독 인터뷰하기도 했다.

저자는 수많은 제약바이오 기업 중에서도 왜 셀트리온이 성공했는지 궁금했다. 연구개발(R&D) 경험과 노하우가 풍부하고 막대한 자본력을 가진 회사들도 번번이 실패하는 바이오업계에서 가진 것 없는 셀트리온이 끝내 해낸 비결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셀트리온의 독특한 DNA를 밝혀내기 위해 2년 동안 창업자인 서정진 회장과 그의 가족, 친구, 전현직 임원들을 인터뷰했다. 인천 송도의 연구개발센터, 생산 공장뿐만 아니라 유럽의 판매 지사와 현지 병원도 탐방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서정진과 임직원들이 지난 20년간 구축해온 문화와 성공의 핵심을 ‘셀트리오니즘’이라고 이름 붙였다.

프롤로그 _가지 않은 길, 하지 않은 방법으로, 끝까지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값싼 약

매년 1월 둘째 주가 되면 전 세계 제약바이오 회사 최고 경영자 CEO들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총집결한다. 세계 최대 바이오 투자 행사인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가 열리기 때문이다.

2020년 1월 15일(현지 시간),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이 콘퍼런스의 마지막 발표자로 연단에 올랐다. 2년 전만 해도 행사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별관 작은 방에서 발표했지만 이날은 달랐다. 셀트리온은 수용 인원 500명으로 가장 큰 발표장인 그랜드볼룸을 배정받았다.

연단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간 서정진은 은퇴 전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앞서 발표한 기업들을 보면서 셀트리온의 목표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대다수가 작년에 얼마만큼 매출을 올렸고 얼마나 많은 이익을 거뒀는지 강조하더군요. 우리가 설명해야 할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제약사의 슬로건이 뭡니까? 제약회사라면 얼마나 많은 환자를 살리려고 노력했는지 말해야 합니다. 인동지능으로 약을 만들면 뭐가 달라집니까? 중요한 건 딱 하나입니다. 가격경쟁력입니다. 동일한 비용으로 예전보다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약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태껏 어떤 제약회사 CEO도 약값을 직접 입에 올린 적은 없었다. 약가를 따지는 것은 격조 낮은 행위로 여겨진다.

셀트리온은 단군 이래 가장 독특하고 희한한 기업일 것이다. 이런 회사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퇴직금, 전세금도 모자라 전 재산을 셀트리온에 투자할 정도의 믿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서정진에게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마법의 피리'라도 있는 걸까? 셀트리온을 취재할수록 의문은 커졌다. 바이오업계의 이단아였던 셀트리온은 어떻게 글로벌 제약사들도 하지 못한 걸 해냈을까? 경험도 일천하고 돈도 없었던 셀트리온이 성공한 이유는 과연 뭘까?

"기업가정신 같은 건 없다"

2019년 1월, 서정진을 만나러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판에 박힌 질문들이 이어지자 그가 말했다.

"전 기자, 기업가정신 같은 건 없어, 환자들을 위해 바이오 회사를 시작했다는 건 다 거짓말이야."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한편으론 속이 시원했다. 감동적인 이야기도 새해 신문을 장식하길 바라는 편직국 데스크에 '한 방' 날려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진, 또 전진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에서 서정진은 프레젠테이션을 이렇게 마무리햇다.

"셀트리온은 더 저렴한 약을 개발하고 공급해서 많은 환자들을 질병에서 구하겠습니다. 회사는 제 후배들이 이끌고 가겠지만 그 친구들에게도 이 정신을 심어놓을 겁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이 목표를 향해서 달려갈 겁니다."

셀트리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셀트리오니즘을 내세우며 전진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책은 한때 사기꾼 기업으로 불렸던 셀트리온이 바이오의약품 판도를 바꾼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1 내일

담대한 선언

"바이오산업을 우리의 미래성장동력으로 키우고 싶다."

있는 그대로 직접 본론부터

2019년 5월 어느 날 인천 송도 셀트리온 본사에 갑자기 서정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마이크를 잡은 것은 셀트리온의 중장기 사업계획인 셀트리온그룹 비전 2030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전인 5월 16일, 서정진은 인천시청에서 '셀트리온그룹 비전 2030 발표 기자간담회'를 열고 2030년까지 헬스케어 사업에 40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선언했다.

야심찬 도전인가 허황된 목표인가

비전 2030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40조 원은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2018년 셀트리온의 연 매출은 9821억 원으로 1조 원에 못 미쳤다. 앞으로 10년 동안 매년 1조씩 모아도 10조 원인데 어떻게 40조 원을 끌어모으겠다는 걸까?

서정진은 40조 원 중 10조 원은 글로벌 투자 기관에서 조달하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30조 원은 어디에서 충당하려는 것일까.

"2019년 말 램시마SC를 허가받고 면역 항암제 5개까지 앞으로 총 20개 제품을 출시할 예정입니다. 이 제품들은 모두 글로벌시장에서 연간 1조 원 이상 매출을 올릴 수 있는 품목들이에요. 보수적으로 잡아도 2030년부터는 연 매출 30조원을 돌파하고 영업이익은 2025년부터 10조 원을 넘어설 겁니다."

셀트리온은 매년 영업이익의 40퍼센트를 R&D에 투입해왔다. 2019년에는 3000억 원을 연구개발에 쏟아부었다.

셀트리온의 매출액 대비 R&D 투자 비율은 2019년 26.9퍼센트로 국내 기업 중 가장 높았다. 화이자, 노바티스, 로슈 등 글로벌 제약회사의 평균적인 매출 대비 투자비는 20퍼센트다.

셀트리온의 경쟁 상대는 화이자

서정진은 이날 경쟁 상대로 화이자를 처음 언급했다.

"글로벌 1위 제약회사 화이자의 작년(2018년) 매출이 55조원, 이익이 16조 원인데 2030년엔 이익 면에서 셀트리온이 화이자에 근접할 겁니다."

셀트리온의 미래 비전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 질문이 계속되자 서정진은 "2000년 직원 6명 데리고 사업을 시작할 때 우리가 화이자에 도전장을 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응수했다.

지속 성장

"월급 보고 일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보고 일합니다."

회장보다 월급이 많은 직원이 있다

셀트리온그룹에서는 스톡옵션으로 수십억 원을 벌어들인 직원들이 꽤 있다. 스톡옵션을 행사한 직원의 연봉은 회장을 가뿐히 능가한다. 그중 전설은 2019년 상반기 163억 8000만원을 수령한 방성도 셀트리온 고문이다.

과장, 차장급 직원이 임원 보수를 넘어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18년 셀트리온헬스케어의 김 모 차장은 스톡옵션 행사로 무려 79억 7700만 원을 받았다.

2019년 3월 주주총회에서 신규 팀장과 본부장 49명에게 47만 주를 지급했는데 1인당 평균 9600주, 당시 종가 19만 2500원 기준으로 약 18억 5000만 원어치였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를 한 채씩 나눠주는 것과 같다.

직원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하다

서정진은 스톡옵션제도를 손질할 생각이 없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서 회사 가치가 상승했으니 보상은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다른 기업의 경우 대체로 스톡옵션은 효과가 일시적이었고 업무 성과를 높이지 못했다. '스톡옵션 지금 -> 동기 저하 -> 사업 정체 -> 주가 하락 -> 퇴사' 라는 반대의 시나리오가 전개되었다.

셀트리온은 스톡옵션을 개인의 동기유발보다 전체의 연대감을 형성한는 용도로 활용했다. 스톡옵션이 임직원의 의욕과 책임감을 고취시켜 이를 기반으로 회사가 성장하고 주가가 상승해 다시 스톡옵션의 가치가 높아지는 선순환을 기대했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스톡옵션 -> 사명감 강화 -> 사업 성장 -> 주가 상승'의 수순을 밟았다.

2 시작

초대형 낙하산

"요점 정리 능력이 남보다 조금 뛰어났던 것 같다."

이익 이유: 스카우트

서정진의 이력은 독특하다. 창업 전에 재직한 회사는 삼성전기, 한국생산성본부, 대우자동차 3곳으로 모두 다른 업종이다. 생명공학이나 제약, 바이오 분야와 관련된 회사도 없다. 두 차례의 이직에 공통점이 있다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였다는 것이다. 매번 함께 일하던 윗사람이 그를 스카우트했다. 그들은 서정진의 명석한 두뇌와 빠른 일 처리, 우직하고 성실한 성품에 감탄하면서 그를 영입했다.

서정진은 대학 졸업 후 1983년 삼성전기에 입사했다. 그를 눈여겨본 손병두 삼성그룹 이사(현 호암재단 이사장)가 1985년 한국생산성본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서정진은 한국생산성본부에서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을 대상으로 경영혁신과 핵심역량 강화를 교육하는 일을 맡았다. 기업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려주는 일을 했다.

그는 30세에 전문위원 명함을 가지고 다녔을 정도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김우중이 꽂은 초대형 낙하산

서정진은 대우그룹을 컨설팅하면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서정진은 대우그룹을 컨설팅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공공기관의 일개 컨설턴트가 대기업 사장과 임원을 상대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우중은 1991년 대우차 기획재무부문 고문으로 서정진을 스카우트한다. 파격 제안이었다. 33세의 새파란 컨설턴트에게 그룹 전체를 개혁할 경영혁신팀 임원 자리를 선뜻 내어준것이다.

서정진은 김우중 회장이 꽂은 낙하산 중에서도 초대형이었다. 대우 사람들은 "얼마나 능력이 특출하기에 회장님 모셔올 정도냐"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를 지켜봤다.

서정진을 비롯해 대우 출신 창업 멤버들은 이런 뒷담화를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라며 웃어 넘겼다.

5인의 의리파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올인 한 게 아니에요."

세기말에 찾아온 손님

1999년 12월 31일 서정진은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너 혼자 보낸 게 미안해서 왔다."

인적 드문 중국 산둥성의 시골 변두리 호텔방으로 들이닥친 서정진의 첫마디였다. 서정진이 찾아간 사람은 대우차 기획조정실에서 같이 일했던 부하 직원이자 지금은 셀트리온 대표이사 부회장이 된 기우성이었다.

서정진이 1992년 대우차 기획조정실에 합류하면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기우성은 1999년 10월 대우차의 옌타이 자동차부품 공장 기공식이 열리기 직전 중국 발령이 났다.

서정진은 팀의 막내였던 기우성을 6개월간 중국으로 보냈다.

그런데 한 달 뒤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태가 터졌다. 글로벌 경영 신화로 주목받았던 대우그룹은 41조 원의 천문학적인 금액을 횡령한 악덕 기업이 됐다.

김대구 대우차 사장과 서정진은 사태에 책임을 지고 새표를 썼다. 상사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기우성은 중국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서정진은 홀로 남은 기우성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5인의 의리파

기우성은 중국까지 찾아온 옛 사수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도 사업이나 하자고 하시더군요. 중국 파견이 끝나는 2000년 3월 31일까지 근무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사표를 냈습니다. 4월 5일 식목일 휴일이었는데 그날부터 인천 연수구청에 있던 사무실로 출근했습니다."

서정진은 대우차에서 나와 벤처기업을 차리고 연수구청에 사무실을 얻어놓았다. 회사 이름은 넥솔. '다음 해결책'을 뜻하는 '넥스트 솔루션'의 줄임말이다.

기우성이 출근하자 사무실에는 대우차에서 같이 일했던 유헌영 차장(현 셀트리온홀딩스 대표이사 부회장)이 때가 꼬질꼬질한 의자와 책상을 걸레로 박박 닦고 있었다. 유헌영도 사수인 서정진의 제안에 하루 만에 대우차를 그만두고 따라나선 참이었다. 서정진은 그를 '셀트리온의 1호 직원'이라고 말한다.

대우차 기획조정실에서 함께 일했던 문광영 차장(전 셀트리온스킨큐어 사장), 이근경 차장(전 셀트리온헬스케어 고문), 김형기 대우차 전략기획팀 팀장(현 셀트리온헬스케어 대표이사 부회장)이 줄줄이 합류했다. 실리콘밸리의 시작이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떠나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설립한 '8인의 배신자들'에서 비롯됐다면 셀트리온의 시작은 대우차 기조실의 '5인의 의리파'인 셈이다.

3 도전

무작정 샌프란시스코로

"큰일을 하려면 큰 사람을 만나야 한다."

번듯한 사무실, 조촐한 창립식

2000년 6월 24일 서정진은 신문 한 귀퉁이를 장식한다. 한국경제신문에 게재된 신설법인현황을 보면 서정진은 넥솔바이오텍, 넥솔넷, 넥솔텔레콤 세 회사를 신고했다.

샌프란시스코행 편도 티켓

서울에 사무실도 생겼고 직원도 뽑았는데 일거리가 없었다.

조명환 건국대 교수는 서정진에게 자신의 '멘토'인 바루크 블럼버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토머스 메리건 스탠퍼드대 에이즈연구소장을 만나보라고 했다.

서정진은 무작정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다. 저비용항공사를 뒤져 편도 항공권을 끊었다. 왕복 항공권을 살 돈도 없었거니와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도 없었다. 제일 저렴한 싸구려 모텔에 짐을 풀고 무작정 메리건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자리에 없었다. 블럼버그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자택과 연구실 근처에서 새우잠을 자며 몇날 며칠을 서성였지만 만날 수 없었다. 이런 날들이 일주일, 한 달째 이어졌다.

서정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폐해져갔다. 돈과 함께 자신감과 자존감도 떨어졌다. 설사 세계적인 석학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일거리가 뚝딱 떨어진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라도 벌어가야 회사 동료들과 가족들을 볼 면목이 있을 것 같았다. 샌프란시스코만의 쇼핑센터 피어39 인근 레스토랑에서 최저 시급을 받고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백스젠의 한국인

"반드시 너의 경쟁 상대가 될 거야."

두드려라, 열릴 때까지

그를 딱하게 여긴 메리건 교수는 '백스젠'을 소개해준다.

백스젠은 미국 생명공학 회사 제넨텍에서 분사한 백신 전문 개발사다.

서정진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신승일 박사였다. 그는 미국 브랜다이스대학에서 생화학과 세포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34살이던 1972년 뉴욕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과대 유전학과 교수로 임명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백스젠의 고민, 신승일의 고민

신승일이 백스젠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국제백신연구소장의 임기가 끝난 뒤인 1999년이다.

신승일은 내심 한국에 공장을 유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신 공장을 짓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갖춰져야 했다. 자본과 첨단기술이 필요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달려든 곳은 싱가포르였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으나

하지만 신승일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한국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신승일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블럼버그 교수에게 에이즈 백신 공장 부지를 찾고 있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블럼버그는 메리건 교수에게 전해들은 서정진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바이오 회사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번 만나보실래요?"

신세계 신대륙

"약속은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처음 만난 세계

사우스샌프란시스코는 생명공학의 탄생지로 불린다. 이곳에 세계적인 생명공학 회사 제넨텍 본사가 있다.

서정진은 백스젠의 소개로 제넨텍의 공장을 견학할 기회를 얻었다. 약이라고는 '아스피린'밖에 알지 못했던 서정진에게 제넨텍 공장은 '신세계'였다.

공장 견학을 마칠 때쯤 공장 총괄 책임자인 제넨텍 부사장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요즘 생산직 인력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2년 동안 힘들게 가르쳐놓으면 다 회사를 떠나요.”

서정진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근무 환경도 좋고 고난도 기술을 요하는 전문직인데 왜들 그만두는 건가요?”

제넨텍 부사장이 대답했다.

“요새 젊은 친구들이 다 그렇죠.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나요? 지루한 일은 체질에 안 맞는다면서 나가겠다고 하더군요. 원래 미국 사람들이 단순 반복 작업이 많은 생산직을 오래 못 버팁니다. 일 좀 할 만하면 2년을 못 견디고 나가버리니 회사로서는 고민일 수밖에요.”

'이거다! 미국에서 연구개발을 하고 한국에서 생산을 하자.'

신약 개발은 섣불리 도전하기엔 리스크가 컸다.

신약 개발에 성공할 확률은 0.02퍼센트에 불과했다.

서정진은 처음부터 신약 개발에 뛰어드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에 바이오 공장을 세운 다음 글로벌 제약사의 의약품 생산 방법 및 기술을 전수받아 생산을 대행해주면 사업성이 있을 것 같았다.

무모한 선택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송도 시대의 출발점

핵심 생산 시설을 보여준다는 건 백스젠과의 관계가 그만큼 진전됐다는 의미였다. 서정진은 한국에 돌아와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 CMO 사업 제안서를 작성했다.

당시 신승일은 한국에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꼴로 한국에 들어왔다.

신승일은 그제야 백신 공장 부지를 찾으러 다니고 있다고 털어놨다. 서정진은 쓰다 만 기획안을 조심스레 들이밀며 말했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미완성 기획안을 훑어보던 신승일은 서정진을 힐끔 쳐다봤다.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눈앞에 있는 이 실업자를 한번 믿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획안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그는 이미 넥솔바이오텍의 고문이 돼 있었다.

협상의 기술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은 안 될 것 같다."

성공을 부르는 이름

합작회사의 출범을 앞두고 사명 공모전이 열렸다. 회사에 지분이 있는 관계자는 모두 참여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백스젠이, 한국에서는 넥솔바이오텍과 벤처투자회사인 J스테판앤컴퍼니, 한국담배인삼공사 임직원들이 아이디어를 냈다.

마땅한 이름이 없어 1차 공모에서 탈락한 것을 모아 재검토했다. 그중 셀트리온이 눈에 들어왔다. 이 이름은 J스테판앤컴퍼니의 임원 신광순이 제안했다.

기독교 신자인 신광순은 ‘이번에 새로 투자한 회사가 잘될 수 있도록 좋은 이름을 달라’고 기도하던 중 ‘트리온스Trions’라는 단어가 갑자기 떠올랐다. 사전을 뒤져보니 라틴어로 ‘하늘의 길잡이’를 뜻했다. 북극성 중 3개의 별인 북극3성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여기에 세포를 뜻하는 셀Cell을 접두어로 붙여 셀트리온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캄캄한 밤에도 여행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알려주는 별처럼 국내 바이오산업의 길을 밝혀주는 기업이 되자는 의미다.

셀트리온 출범

"외국이 사갈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로또가 된 공장 부지 매입

셀트리온은 2002년 2월 25일, 송도 공장 부지 2만 8000여 평을 '단돈' 145억 원에 매입했다. 평당 52만 원이다. 그로부터 1년 6개월 뒤인 2003년 8월, 송도는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다. 셀트리온이 보유한 공장 부지의 가치는 1000억 원대로 불어났다.

땅문서마저 없었더라면 셀트리온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투자금 조달이 어려울 때 토지를 담보로 융자를 받아 연구개발비를 충당하며 버텼기 때문이다.

뭐 하는 회사입니까?

2002년 2월 26일 드디어 셀트리온이 출범했다. 조인트벤처 MOU를 체결한 지 4개월 만이다. 동물세포 배양 기술을 이용한 바이오의약품 생산업체로는 아시아 최초였다. 이날 백스젠은 셀트리온과의 합작 계약식에 이어 현물 출자분 3000만 달러에 대한 투자 신고서를 산업자원부에 제출했다.

셀트리온이라는 합작사 이름은 이날 최초로 공개됐다. 이제 넥솔 대신 셀트리온 네 글자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셀트리온의 대표이사로서 가진 첫 인터뷰에서 서정진은 글로벌 바이오 회사가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서정진은 이날 "2007년부터 항암제를 비롯한 다양한 바이오의약품 생산에 나서겠다"고 했다. 백스젠에게 이전받은 동물세포 배양 기술을 활용할 방법을 이미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신은 외국인이 사갈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노하우'를 얻기 위한 '미끼'일 뿐이었다.

송도 공장을 바이오의약품 생산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4 고난

백스젠의 실패

"목표는 원대할수록 좋고, 널리 알릴수록 좋다."

파이프라인 하나에 매달리지 말라

2003년 11월 12일, 백스젠은 에이즈 백신의 임상 실패를 공식화했다. 5년간 투자한 돈을 모두 날리게 된 백스젠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신뢰를 잃은 백스젠은 2004년 8월 나스닥시장에서 퇴출된다.

백스젠은 결국 셀트리온의 공동대표직에서 물러나 사실상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된다. 이제 셀트리온이 기댈 곳은 셀트리온 자신밖에 없었다.

홀로서기

"내가 변하니 세상이 달라졌다."

딱 보름만 더 살다 죽자

2004년 송도 공장은 기초공사가 끝나고 골조가 올라가 제법 모양새가 갖춰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공장이 완공될 때쯤 백스젠으로부터 에이즈 백신 위탁생산 계약금이 들어와야 했다. 그러나 백스젠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손을 내미는 금융기관은 한 곳도 없었다. 서정진은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명동 사채시장에서 돈을 빌렸다.

20억 달러 계약

그러다 기회가 왔다. 글로벌 7위 제약사이던 BMS(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가 관절염을 치료하는 융합 단백질의약품인 ‘오렌시아’(성분명 아바타셉트)의 생산을 스위스 론자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셀트리온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셀트리온과 BMS는 2005년 6월 22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오렌시아의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 계약을 맺는다. 계약 규모는 20억 달러. 우리 돈으로 2조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기본 계약 기간인 6년을 채우고 4년간 연장해 10년 동안 생산했을 때를 전제한 것이지만 첫 계약치고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해외에서도 셀트리온과 BMS의 계약 소식은 핫 토픽감이었다. 아시아에 바이오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는 생명공학 회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첫 단추가 잘 끼워지자 일이 술술 풀렸다. 셀트리온은 BMS와 계약한 지 한 달 뒤인 7월 25일 암 치료제 개발 전문 바이오 기업인 이게니온과 대장암 치료용 바이오 신약 'IGN11'의 공동개발 계약을 체결한다.

5 변화

바이오시밀러 선언

"파트너사 한 곳만 성공해도 본전, 실패해도 R&D 경험과 노하우는 남는다."

멀리 길게 본다

셀트리온이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놀랍게도 돈다발이 굴러들어오던 2007년 말이다. FDA의 cGMP 승인이 떨어져 마침내 항체의약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됐던 때다.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

2008년 1월 24일, 셀트리온은 비로소 '실적 발표'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회사 설립 5년 만에 처음으로 매출과 영업이익이 났다.

직원들도 "이제는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며 안도했다. 단 한 사람만 빼놓고.

다품종 소량생산을 할수록 손실은 더욱 커졌다. A라는 제품을 만들다 B로 바꾸면 바이오 리액터(배양기)를 세척, 소독, 건조하고 생산 시스템을 교체하는 ‘체인지 오버’ 작업에 시간과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고객사의 주문에 기대는 방식으로는 미래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현실을 자각한 서정진은 미국에 있던 홍승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이오시밀러를 해야겠다."

2008년 1월이었다.

서정진의 구상은 2008년 9월 9일 서울 소공동 웨스턴조선호텔에서 열린 '바이오시밀러 개발 선포식'에서 공개됐다. 셀트리온은 2011년부터 항체의약품 7종을 전 세계에 출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셀트리온의 사업계획은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오죽했으면 바이오 담담 애널리스트들이 셀트리온에 대한 보고서를 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셀트리온은 주식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셀트리온은 2008년 8월 말 코스탁 시총 순위 114위에서 9월 말 5위로 수직 상승했고 연말에는 4위에 오른다.

제약사 인수

"그딴 식으로 영업할 생각 없어! 안 팔아도 되니까 일절 리베이트 주지 마!"

불도저로 만든 샛길

2008년 8월, 코디너스라는 회사가 주식시장에서 핫이슈로 떠올랐다.

인터넷 쇼핑몰 운영업체였던 코디너스는 무선인터넷 토털 솔루션 기업으로 둔갑했고 ‘재벌 테마주’로 불리며 주가가 폭등했다. 그러나 재벌가 자제들의 ‘누워서 돈 벌기’ 수단으로 지목되면서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올랐다. 경영진은 주가조작과 횡령, 배임 혐의로 물러난다. 경영 공백 상태이던 코디너스는 2009년 1월 회사를 구해줄 새로운 대표이사를 영입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5개월 뒤 중소 제약사인 한서제약의 지분을 150억 원에 인수하고 완전히 다른 회사로 다시 태어난다. 바로 셀트리온제약이다.

BMS와의 결별

"될지 안 될지 생각하는 사람은 못 한다."

경이로운 실행력

서정진은 2009년 5월 말부터 6월까지 한 달 동안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속도로 바이오시밀러 공급 계약을 맺었다. 베네수엘라, 페루 등 중남미 10개국을 비롯해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 터키, 인도 등 약 20개국과 계약을 체결했다.

배를 불태우다

2010년 1월 25일 셀트리온은 BMS와 CMO 계약을 중단한다고 선언한다. 셀트리온이 BMS에 오렌시아의 원료를 공급하면서 거둬들인 매출액은 1191억 원. 그동안 BMS와의 계약으로 먹고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0년 동안 장기 계약을 그대로 유지하면 매년 천억 원대 매출을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계약을 중단하면 비빌 언덕이 사라지는데도 서정진은 돌아갈 배를 태워버렸다.

셀트리온이 BMS와 계약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데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두 회사의 갈등이 극에 달했고 둘째, 오렌시아가 생각보다 많이 팔리지 않았으며 셋째, BMS가 자체 공장을 짓기로 결정하면서다.

6 도약

세계 최초의 바이오시밀러

"페이퍼(보고서)에 없는 것은 필드(현장)에 있다."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

“이제 사기꾼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

램시마의 허가 소식이 전해지자 서정진이 내뱉은 첫마디다. 2012년 7월 23일 식품의약품안전청(현 식품의약품안전처)은 램시마의 품목 허가를 발표했다. 세계 최초 바이오시밀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램시마는 존슨앤드존슨이 개발한 항체의약품 레미케이드를 복제한 제품이다.

항체의약품은 단백질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살아 있는 세포로 만들기 때문에 똑같이 복제할 수 없다.

완전히 동일한 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서 '비슷하다'는 의미의 '시밀러similar'로 부른다.

비슷하게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셀트리온은 2002년 프로젝트명 CT-P13으로 불렸던 램시마 개발에 착수해 허가를 받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연구개발과 임상에 투입된 비용은 2000억 원이다.

험난한 아메리칸드림

"이제 꿈을 실현한 회사가 됐어요. 도약할 일만 남았습니다."

빅 이벤트

셀트리온이 램시마로 FDA 허가를 받은 것은 2016년 4월 6일 이다. 2014년 8월 허가를 신청하고 나서 약 2년이 걸렸다. 램시마가 세계 최초로 바이오시밀러로 EMA 허가를 받은 시점으로부터도 2년 8개월 뒤였으니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첫 FDA 승인 발표는 한 달 전부터 특급 호텔을 빌려 준비했을 정도로 셀트리온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만큼 어려웠다. FDA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아메리칸 스타일로 해야 만족한다. 미국인 환자를 포함시켜 임상시험을 하고 서류도 다시 작성해서 내야 겨우 합격이다. 미국 제약사들의 방해 공작도 허가가 늦어지는 요인이다. 유럽은 공공보험제도가 발달돼 있어 오리지널보다 가격이 최대 절반 가까이 싼 바이오시밀러를 도입하는 게 유리하다. 미국은 사보험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유럽과 상황이 다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부터 조금씩 변화가 생겼지만 그전까지 바이오시밀러는 안중에도 없었다.

미국 제약사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굴었는지는 셀트리온이 괴롭힘당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처음엔 힘을 합쳐 ‘씨 말리기’ 전략을 구사했다. 바이오시밀러가 아메리카 대륙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말려 죽이는 것이다. 1차적으로 특허로 방어벽을 쌓아놓고 오바마 정부가 의료 개혁을 위해 제정한 바이오의약품 가격 및 혁신법BPCIA에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이 법은 FDA가 바이오시밀러를 신속하게 심사하고 바이오의약품과 가격경쟁이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일명 ‘바이오시밀러법’으로 불린다. 빅파마들이 바이오시밀러의 진입을 결사반대하는 동안 셀트리온은 끈질기게 달려들어 임상에 성공했다. 산도즈, 삼성바이오에피스, 암젠 등이 뒤따랐다. 2012년 6월 미국 법원은 바이오시밀러법을 합헌으로 결정했다. 대세는 바이오시밀러로 돌아섰다. 제약사들은 국지전에 돌입했다. 이제부터는 ‘시간 끌기’ 전법에 돌입했다.

소송전

셀트리온의 아메리칸드림은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도 이뤄지지 않았다. 2016년 11월 미국에 출시된 램시마의 2020년 1분기 시장점유율은 10퍼센트대에 머물러 있다. 유럽에서는 출시 1년 만에 30퍼센트를 돌파했는데 미국에서는 4년째 고전 중이다.

7 원칙

본질에 집중한다

"우리 회사에 투자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한국 회사라는 건 알아야지."

수단은 수단이다

서정진은 '글로벌화'를 주창하지만 정작 본인은 영어 공부에 관심이 없다. 그가 따로 영어 수업을 받는다거나 영어 공부를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서정진은 영어를 콤플렉스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내가 영어까지 잘하면 통역사들은 어떻게 먹고 사느냐"면서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사람들을 쓰면 된다"고 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서정진의 지론대로 셀트리온은 사람을 뽑을 때 영어보다 실력과 됨됨이를 중요하게 본다.

현재 회장, 부회장, 연구소장까지 모두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순수 국내파다. 그래서 회장과 부회장은 모두 전담 통역사를 구고 있다. 보고나 회의를 할때는 무조건 한국어를 쓴다.

셀트리온에서는 자기 분야에 전문성이 있으면 영어가 어눌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도전하고 배우려는 자세와 태도만 있으면 영어는 자연스레 늘게 돼 있기 때문이다.

기우성은 심지어 "제아무리 똑똑하다는 유태인도 한국인의 머리를 따라갈 수 없다" 고 말한다. 아마도 서정진과 창업 멤버들이 부모 세대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 속에서 성장했고 민주주의와 산업화 과정을 지켜본 세대이기에 그럴 것이다. 셀트리온은 한국인의 집념과 헝그리 정신이 지금의 회사를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한국인의 DNA를 잃지 않기 위해 우리말을 소중히 여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인생, 남에게 묻지 않는다

"아직 성공하지 않았을 뿐이다. 불가능하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프레임을 걷어야 해결책이 보인다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에게서 성공 비결을 듣는다는 취지로 열린 청년 포럼에 연사로 초대받은 서정진은 멘토링 행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로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멘토링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단어 안 좋아합니다. 지 인생 지가 사는 건데 누가 어드바이스 해요? 누가 한 수 지도해주면 인생이 바뀌더라? 여러분은 줏대도 없고 자존심도 없습니까?"

진행자는 '엄친아, 엄친딸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느냐?' 부터 시작해 '나는 금수저인가 흙수저인가?'등의 질문을 던졌다.

"제가 젊을 땐 엄친딸, 엄친아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흙수저라는 말도 당연히 없었죠. 여러분들이 만든 허상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관념의 허구 속에 살고 있어요. 흙수저, 금수저를 논하는 게 여러분들에게 대체 무슨 도움이 됩니까? 관념의 틀에 갇혀 있으면 빠져나오려고 해도 탈출구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내 수저든 남의 수저든 수저의 색깔이나 재질에 신경 쓰지 않아야 해결되는 일이다. 서정진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금수저와 흙수저로 분류하는 짓을 관둬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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