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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읽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1페이지 미술 365"

by 욕심쟁이77 2021.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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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

수만 년을 거슬러 현재에 다다른 예술 작품들 속에서 아름다움과 재미, 감동을 짚어내어 지식의 저변을 넓혀주는 미술 에세이스트이다. 세종문화회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법제처, 용인문화재단 등을 비롯한 공공단체나, 여러 기업과 갤러리, 도서관 등에서 미술사를 강의했고, 미술과 관련된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고려대학교에서 서어서문학을 전공했고, 주한 칠레 대사관과 주한 볼리비아 대사관에서 일했다. 마흔 살 즈음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 미술사를 공부했다.

《루브르와 오르세 명화 산책》, 《미술관에서 읽는 세계사》, 《피렌체 예술 산책》, 《네덜란드 벨기에 미술관 산책》, 《현대 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바티칸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 100》, 《우피치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 100》, 《신화로 쓰고 역사로 읽는 그리스》, 《성화, 그림이 된 성서》 등 20권 이상의 미술 관련 책을 썼다

001. 오필리아

오필리아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드라마 햄릿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덴마크의 젊은 귀족 여성, 폴 레니 우스의 딸, 라 에르 테스의 여동생, 햄릿 왕자 햄릿의 잠재적 인 아내, 햄릿의 행동으로 인해 결국 익사로 이어질 광기 상태에 빠진다.

002. 원시미술 I

쇼베동굴 벽화는 장 마리 쇼베라는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쇼베동굴 벽화에서는 동굴사자 그림이 73점이나 되는데 사자를 두려움이나 혐오스러운 존재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마치 숭고한 존재처럼 그려져있는 특징이 있다. 벽화에는 사자 뿐만이 아니라 코뿔소,곰,표범같은 수많은 동물들이 그려져있다 헬렌 박사가 이끄는 조사팀이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조사를 해보았는데 이 쇼베 동굴 벽화가 2만9천년전에서 3만2천년 사이에 그려진 작품들이라고 한다. 바위 암벽에 새겨진 특정적인 예술품들이 알타미라동굴과 라스코 벽화만큼 정교하다고 알려져 있다.

003.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이미 너무나 유명해서 이름만 들어도 '스스로 귀를 자른', '37세 나이에 자살한' 등의 수식어와 함께 고통, 슬픔, 광기, 집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화가다. 작품이 최고 경매가를 경신했다는 타이틀로 자주 뉴스에 등장하지만. 살아생전 공식적으로 판매한 그림은 딱 한 점에 불과하다.

007.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산 채로 잡아먹는 '크로노스'는 화가 고야(1746~1828)의 조국인 스페인을 호시탐탐 노리는 외세 프랑스이거나, 선량한 국민을 우롱하는 부패한 스페인 지도층, 이성의 시대에도 회행하는 광기와 야만 그자체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

008.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1519)가 <모나리자>에서 그랬던 것처럼, 얼굴 피부와 이어지는 눈, 코, 입의 윤곽선을 살짝 희미하게 그려 사실적인 느낌을 강조한 이 그림은 '북구의 모나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화가가 살았던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유행한 청화백자를 떠올리게 하는 파란색, 특유의 차분한 노란색, 입술을 찍어 누른 붉은색, 이 세 가지 색에 하얀색과 검은색만 덧붙인 담백하고 정갈한 초상화는 사실 모델이 누구인지 밝혀지니 않았다.

022. 붉은색의 조화(후식)

앙리 마티스(1869~1954년)는 그림에서 세부 묘사를 과감하게 생락했고, 형태 역시 가장 기본이 되는 것만 남겼다. 색체는 대상이 가진 실제의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시각적인 쾌감을 위해서나 존재하는 듯한 색채들은, 명함이 사라지고 원근감이 희미해진 화면을 평평하게 뒤덮으면서 장식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027. 프리다 칼로, 그를 가두다

18세 때 갑작스레 일어난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된 프리다 칼로(1907~1954)는 재활에 성공, 보조기를 착용하고 걸을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운명적 인물과 마주치게 되는데, 멕시코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그냐와 거의 같은 뜻을 가진 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난 것이다. 그는 멕시코 특유의 색채가 물씬 풍기는 벽화 제작으로 이미 거물급 화가로 존경받고 있었다. 21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034 쌍둥이 모나리자의 발견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는 루브르 박물관의 그 유명한 <모나리자>와 거의 흡사하지만, 더 젊고 가느다란 눈썹이 있으며 배경까지 마무리된 <모나리자>가 전시되어 있다.

발견 당시 시커먼 먼지들이 엉겨 붙어 있어 몰랐으나, 복원 과정에서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거의 비슷한 배경에 같은 자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 모두를 놀라게 했다.

038. 클로드 모네

모네의 초상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 북부 해안 도시 르아브르에서 성장한 모네는 동네 사람들의 캐리커처를 그려주면서 유명해졌다. 그의 그림은 동네 한 화구상에 진열되었는데, 화구상의 동업자인 와젠부댕이 그를 불러 제자 삼고, 함께 르아브르의 해안가 풍경을 그리면서 화가의 꿈을 본격적으로 키우게 되었다.

043. 해바라기

고갱이 온다는 소식에 한껏 흥분한 고흐는 그가 머물 방을 장식할 <해바라기>를 그렸다. 그는 고갱이 자신의 해바라기 그림을 크게 칭찬해주고, 고객의 다른 그림과 교환까지 해줬던 일을 잊지 않는다. 원래 방 전체를 해바라기 그림으로 가득 채울 생각이었으나, 잘 된 작품만 골라 두 점을 걸었다.

046. 데쿠파주

앙리마티스 <푸른 누드>

색체의 거장이라 불리던 화가, 마티스는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림과 조각 작업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작업 방식을 모색하던 그는 종이 오리기와 붙이기를 고안해냈다. '데쿠파주 Decoupage'라고 불리는 이 기법은 종이를 오린 뒤 색을 칠하거나, 색을 칠할 종이를 오려서 미리 준비한 다른 종이 위에 덧붙이는 식으로 구도를 잡아나간다. 섬세하게 디테일을 살리기보다는 선명하고 밝고 간결한 색의 단순한 형태로 화면을 구성한다.

059.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군인 자화상

독일 표현주의의 거장으로, '다리파'라는 진보적인 회화 집단을 이끌었던 키르히너는 거칠고 강력한 선과 색으로 눈이 아닌 가슴을 자극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건축을 전공했고, 이후 뮌헨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어깨에 적힌 75라는 숫자는 키르히너 자신이 복무하던 75포병부대를 떠올리며 가져온 것이다.

060. 트롱프뢰유

프랑스어로 '눈을 속이다'라는 뜻을 가진 '트롱프뢰유'는 보는 사람이 그림이라 생각지 못할 정도로, 실제와 가깝게 그리는 기법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의 제욱시스는 그림을 워낙 잘 그렸는데, 포도를 그리면 새들이 그 포도를 먹기 위해 달려들 정도였다.

071 쾌락의 정원

미술관에서 그림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다면 해볼 만한 가장 좋은 감상법은, 관람객이 많이 모인 그림에 먼저 다가가는 일이다. 현대인이 보아도 그 기발한 상상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인 이 그림 앞에는 언제나 인파가 몰려 있다.

078 피에타

<피에타>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미술에서는 죽은 예수를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의미한다. 미켈란젤로가 24세 때 완성한 것으로, 피렌체 출신의 애송이에 불과하던 그를 바티칸에서 일약 스타급 조각가로 발돋움하게 한 작품이다.

106 만종

밀레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가난하고 소외당한 계층, 특히 농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그림은 그려 '농민화가'라고 불렸다. 파리의 복잡한 삶을 떠나 바르비종에서 대자연의 풍경를 그리던 화가 집단을 '바르비종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보이는 그대로의 자연을 화폭에 담았다는 점에서 연출된 자여을 그리던 이전 시대의 화가들과 차이를 두었다. 밀레 역시 바르비종파 중 한 사람이었으나 그 자연 속에 언제나 사람, 특히 농부를 주인공으로 두었다는 점에서 또 다르다.

109 점묘법

신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 이후 전개된 미술 양식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쇠라와 시냐크는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이 그렇듯, 가능한 한 팔레트에서 색을 섞지 않고 캔버스 위에서 색들을 나열하는 방법을 썼다.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들의 화면은 미세한 점으로 분할되고 색체도 순수한 원색으로 분할된다는 점을 들어 자신들의 그림을 분할주의, 즉 디비조니즘 Divisionnisme 이라고 불렀다.

117. 십자군 전쟁

외젠 들라크루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기독교인들을 위협하는 이슬람 세력, 셀주크튀르크 민족은 기독교 최고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로마의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비잔틴제국긩 황제에게 도움을 청해 함께 이들을 소탕하자고 제안, 십자군전쟁의 발발을 유도했다. 200년 동안 이어진 이 긴 전쟁의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은 딱 한 차례의 승리만 맛보았을 뿐이다. 이 전쟁은 종교적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지중해 무역권이나 영토 확보를 둘러싼 세속적인 욕망에 불과했다.

124. 페스트의 대유행

흑사병, 소위 페스트라고 브르는 이 치명적인 전염병은 14세기 유럽 인구 30%에서 60%까지 줄어들게 했다. 농업인구의 감소로 봉건제도의 붕괴가 가속화되었고, 유대인들이 병을 옮긴다는 식의 가짜 뉴스까지 등장해 인종차별이 극심해지기도 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었고, 기적에 대한 갈망이 극대화 되면서 치유의 성자들을 기리른 성당 건축과 이미지 작업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125. 요한인가, 마리아 막달레나인가

성서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인 '최후의 만찬' 모습은 주로 수도원 내부 식당 벽면에 그려지곤 했다. 다빈치의 이 유명한 그림도 밀라노의 한 성당 수도원 식당에 그려진 것으로, 형편없이 훼손됭ㅆ다가 복원되었다. 조화와 질서, 균형을 사랑하는 르네상스 화가답게 다빈치는 중앙의 예수를 중심으로 양쪽에 3명씩 두 무리를 배치했고, 공간 억시 좌우 대칭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예수 되에는 창을 두어, 후광을 그리지 않고도 그의 존재에 집중하게 했다. 예수의 오른편에 역삼각형의 공간을 만들며 애제자 요한이 앉아 있다. 그의 옆에 베드로가 바싹 다가와 있다.

128. 베네치아 르네상스

이탈리아 귀족 저책의 침실로 보이는 곳에서 한 여인이 화면 밖을 바라본다. 적어도 19세기까지, 흔히 아프로디테라는 이름을 핑계처럼 단 누드의 여성들은 고개를 살며시 돌리거나, 손으로 자신의 시선을 가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티치아노의 그녀는 그림 앞에 선 감상자에게 도발적인 시선을 던지며, 감상자의 관음적인 시선을 불편하게 만든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출신 화가들이 그러하듯, 빛과 그 빛에 따른 색체의 변화를 치밀하게 잡아내는 데 뛰어났으며, 그림에 손을 대보고 싶을 만큼 사실적인 질감 처리에 뛰어나다.

131. 백년전쟁

백년전쟁은 1337년에서 1453년 사이, 프랑스의 왕위 계승문제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 간에 일어난 100여 년간의 전쟁을 일컫는 말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왕가의 정략결혼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한 가족에 가까웠기에,왕위 계승문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134. 절규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화가들의 관심은 서서히 내 '눈'에 비친 세계를 충실하게 그리는 일에서 내 '마음'이 읽는 세계를 담아내는 쪽으로 옮겨갔다. 즉 화가 자신의 주관적인 정서 상태, 감정 등이 닿은 세상을 그린 것이다. 뭉크는 이 작품을 스케치와 유화로 여러 점 그렸는데, 그중 하나에는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것'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137. 모자이크

서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의 왕비로 남편이 사망하자 겨우 5살짜리 아들의 섭정을 해오던 갈라 플라치디아는, 당신 제국의 수도로 삼았던 라벤나에 많은 교회를 세웠다.

141. 키스

벼랑 끝의 남녀가 외투 혹은 이불을 몸에 두르고, 열정적인 키스를 나눈다. 남녀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마치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작품처럼 화려하고 장식적일 뿐, 원근감이나 양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평면적이다. 검은색, 회색 등 무채색의 사각 형태 문양은 남자 쪽을, 빨강과 초록, 파랑, 보라 등의 다채로운 색을 입은 둥근 문양을 여자 쪽을 장식한다. 둘의 달콤한 키스에 황금 향이 꿀처럼 뚝뚝 떨어질 듯하다.

151. 풍경화

푸생은 풍경화를 그릴 때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나무와 바위 등을 모형으로 제작해서 임의로 배치하여 흡족한 구도로 만든 뒤에 그리는 방식을 썻다. 그리고 그림 속에 신화나 성경의 내용처럼 읽어낼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담았다. 이 작품은 리슐리외 공작의 주문을 받고 1660년부터 약 4년간, 중풍으로 떨리는 손을 진정시켜가며 그린 '사계절' 연작 중 하나로, <가을>에 해당한다.

153. 영국 정부가 반출을 막은 보물

터너가 스위스를 영행하는 동안 그린작품으로, 루체른 호수에서 바라본 리기산의 모습을 담았다. 인상파 화가들을 예언하듯, 그는 태양 빛에 따른 대기와 색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하여 그림으로 옮겼다. 리기산 시리즈 중 가장 대표적인 3점으로는, 동트기 전의 어두운 풍광을 그린 <어두운 리기산>과 해 질 녘 모습을 담은 <붉은 리기산>, 그리고 <푸른 리기산>이 꼽힌다.

156. 바로크 미술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을 위한 엄청난 경비 조달을 위해 카톨릭교회는 면죄부끼지 팔았다. 그런 행태를 비난하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교회는 위축되기는커녕, 멀어져가는 신도들의 마음을 더 강렬하게 사로잡기 위한 '반종교개혁' 미술을 주도했다. 성당 건축은 더욱 화려해졌고, 조각은 역동적으로 바뀌었으며, 그림에서는 시선을 한순간에 낚아채는 주제와 기법이 발전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 17세기 미술을 후대 사가들은 '바로크'라고 불렀다.

162. 밤의 카페 테라스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와 함께 살던 파리를 떠나 아를로 온 뒤부터 남프랑스의 햇빛을 닮은 노란색에 더욱 애정을 가졌다. 노란색은 태양이 사라진 밤 카페의 가스등이나, 별칯을 그릴 때도 하얀색과 함께 사용되었다.

167. 발코니에 숨겨진 아이

마네는 자신의 피아노 선생이었던 수잔 린호프와 결혼했다. 그녀에게는 이미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늘 동생으로 소개하곤 했다. 또한 마네와 수잔 두 사람은 결혼하기 오래전부터 동거하던 사이였으나, 이 사실을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아버지를 비롯해 아무도 모르도록 비밀로 했다. 마네는 그냐와 정식으로 결혼하면서도 수잔이 데리고 온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169.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물감을 팔레트에서 섞으면 색이 탁해진다는 점을 감안, 미세하게 작은 점들을 찍어서 그림을 보는 사람의 눈에서 섞이도록 하는 점묘법의 대가, 쇠라는 이 작품을 1886년에 8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인상ㅇ주의 전시회에 출품했다. '그랑자트'는 '큰 접시'라는 뜻으로, 파리 북서쪽에 있는 섬의 모습이 접시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주말이면 파리의 중산층부터 노동자까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모여든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댔다.

184. 로코코 미술 I

'짐이 곧 국가' 임을 첨명했던 절대 왕권의 루이 14세 시대가 저물고, 루이 15세의 시대에 이르면서 귀족들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루이 14세의 요청으로 베르사유에 머물렀던 귀족들은 파리로 돌아왔고,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저택을 치장했으며, 향락적이고, 다소 퇴폐적인 문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198. 로코코 미술 II

파스텔 색조의 화사한 옷에 모자를 쓴 한 여인이 햇살을 가로지으며 신나게 그네를 타고 있다. 그네의 속도에 신고 있던 신발이 날아간다.

그림 오른쪽에서 나이가 지긋한 한 남자가 그네를 밀어주는 동안, 왼쪽에선 젊은 남자가 그녀의 치마 속을 훔쳐보고 있다. 젊은 남자의 머리 위로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댄 모습의 조각상이 보인다. '종용히 하라!'는 뜻으로 이 남자의 존재를 그네를 미는 늙은 남자가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205. 신 고전주의 I

18세기 말, 영국과 프랑스에서 지나치게 사적이고 감각적인 로코코 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신고전주의' 미술은 공적이고, 이상적이며, 지고한 도덕적 이상을 미술로 펼치려 했다. 신화, 종교, 영웅 등의 교훈적이며 고전적인 주제가 재등장했고,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처럼 질서와 조화가 돋보이는 완벽한 구도와 형태, 향수를 자극하는 고대 건축물 등의 배경이 그 특징이었다. 더불어 신고전주의의 미술이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화산재에 파묻혀 있던 품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발굴되면서 고대 로마에 대한 향수가 유럽 전역을 강타한 영향도 있다.

219. 낭만주의 I

<아탈라의 매장>은 1801년에 출간된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의 소설, <아탈라>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미국 인디오와 유럽인 사이에 태어나 혼혈 소녀, 아탈라는 사형수가 된 한 인디오 포로와 예기치 못한 사건을 계기로 함께 도주하면서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나 아탈라의 어머니는 딸을 낳으면서, 그녀를 하느님의 아내로 바친다는 서약을 한 터였다. 아탈라는 사랑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서약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232. 세네치오

성악과 교수 아버지와 음악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클레는 바이올린에 뛰어난 신동이었다. 그는 스위스 베른시 교향악단 단원이자 음악 비평가로서도 활동했다.

그림 속에서 대상의 형태를 식별할 수 없는 수준을 추상이라고 한다면, 그의 이 그림은 무엇인지 알 수는 있지만 형태가 기하학적 모양으로 단순화되고, 색채 도한 사실적인 묘사와 거리를 두는 '반추상'이라고 볼 수 있다.

233. 낭만주의 II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인간 이성에 호소하는 신고전주의 미술이 아카데미의 등을 업고 화단을 주도했다. 그러나 죽음, 공포, 이국적인 것들을 주요 소재로 하는 낭만주의자들은 공적이고 선전적인 신고전주의와 달리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주제의 그림을 르렸다. 제리코는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적 화가였다. 이 그림은 특히 당대에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을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 유명세를 치렀다.

240. 낭만주의 III

19세기 신고전주의 미술이 과거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추구해 공공의 선을 중요시했다면, 그 대척점에 선낭만주의 미술은 감정을 중요시하고 객관보다는 주관, 나아가 개인의 자유로운 정서를 표현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두었다.

254. 사실주의

<오르낭의 매장>은 귀스타브 쿠르베의 고향 마을에서 치러진 친지의 장례식 장면을 그린 것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50여 명의 인물은 모두 화가의 지인들로 사외 저명인사라기보다는 고향 사람들에 불과하다.

256. 꽃 정물화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꽃 그림을 사는 편이, 금방 시들어버릴 실물 꽃을 사는 편보다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았다. 16세기 말부터 오스만퀴르크, 즉 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서구 유럽, 특히 네덜란드로 유입된 튤립은 상상 이상으로 수요가 폭증했다. 경제에 밝은 네덜란드인들은 꽃을 두기 대상으로 삼았다. 아직 피지 않은 구근에 선물투자를 한 것이다.

264. 미국 독립 전쟁

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체로 남아메리카로,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한다. 미국 동부 지역에서는 청교도 박해를 피해 몰려온 영국인들을 중심으로 13개 주가 만들어졌는데, 곧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이 식민지의 세수 증대를 위해 인도에서 들이는 홍차의 수입세를 크게 늘리자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기로 1776년에 미국의 13개 주 대표들이 모여 독립을 선언,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미국 독립 전댕의 선봉은 조지 워싱턴으로 영국과 적대적인 입장이던 프랑스와 스페인의 도움을 받아 승기를 잡게 된다.

신고전주의 II

앵그르는 이 작품을 이탈리아에서 머물던 1820년경에 그리기 시작해, 1856년에 파리에서 완성했다. 모델은 앵그르가 살던 아파트 관리인의 16살 정도 된딸이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그림이 완성될 무렵 그녀는 쉽에 가까운 나이가 외었을 것이다.

288. 최후의 심판

교황청은 카를 5세의 로마 약탈과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황청의 절대 권력에 균열이 생기자 위기감을 느끼고, 그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로써 '최후의 심판'이라는 주제의 제단화를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했다. 1535년에 시작해 이윽고 1641년 가을, 총 면적 약 167㎥의 벽면에 291명이나 되는 임물로 가득 찬 그림이 완성되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303. 표현주의

표현주의 미술은 르네상스 이래 미술이 추구해온 세상의 재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이다. 그들에게 있어 미술은 대상의 외관을 베끼듯 그리는 게 아닌, 어떤 감정이나 감각 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310. 상징주의

'비현실적', '꿈', '몽환', '환상' 과 같은 키워드로 함축되는 상징주의는 19세기 말, 세기말의 혼란과 불안 속에서 등장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렸다면 상징주의 화가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러나 감성과 감각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를 그렸다.

324. 야수파

397명의 작가가 참가해1600여점의 작품을 출품한 1905년 가을의 제3회 살롱 도톤느는 더는 그 위세가 예전같지 않은 살롱전의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이 전시는 무엇보다 '7번 전시실' 벽에 걸린 작품들 때문에 큰 주목을 받았다. 마티스, 블라맹크, 드랭, 뒤피, 브라크, 루오 같은 이들이 그린 작품들은 일단 그 색채부터 충격적이었다.

335. 모네의 또 다른 사랑

모네에 대한 평가가 조롱으로 일관되던 시절, 에르네스트 오슈데는 모네의 작품을 기꺼이 사준 든든한 후원자였다. 모네는 작업을 위해 한동안 그의 별장에 머물렀다. 파리에서 집까지의 전용 기차를 두었을 정도로 막강한 재력을 과시하던 오슈데는 파산으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고, 구속을 피하고자 잠시 프랑스를 떠나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모네에게 맡겼다.

338. 신조형주의

눈에 보이는 대상들은 죄다 그 모습이 다르지만, 그 다름을 제거하다 보념 결국 본질에 닿을 수 있다.

354. 초상화

신 중심의 중세와 달리,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팽배해지는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초상화 제작이 활발해졌다. 귀족들이나 신흥 부유층은 고대 로마의 황제나 귀족들처럼 동전이나 메달에 완전 측면의 자기 얼굴을 새겨 모으기도 했는데, 이것이 초상화 주문과 제작으로 이어졌다.

365. 까마귀 나는 밀밭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그가 생의 마지막을 살던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밀밭은 딱 이런 모습이었고 지금도 이와 흡사하다. 그는 색채를 대담하게 왜곡했고, 형태 또한 단순화하거나 변형가기 일쑤였지만, 자신이 직접 목격하지 않은 것은 함부로 그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언제나 그와 함께했던 순간을 품고 있다.

365개의 그림 그리고 역사, 작품, 기법등 서양미술을 마스터할수있는 책이다. 다 다루기에는 너무 방대해서 익숙한것만 다루게 되었지만 두고두고 볼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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