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샐리 티스데일
[VIOLATION], [TALK DIRTY TO ME], [STEPPING WESTWARD], [WOMEN OF THE WAY]등 다양한 작품을 저술했다. 푸시카트 문학상(PUSHCART PRIZE), 국립예술기금 연구원(NEA FELLOWSHIP), 제임스 D. 팰런 문학상(JAMES D. PHELAN LITERARY AWARD)을 받았고, 숀펠트 객원 작가 시리즈(SCHOENFELDT DISTINGUISHED VISITING WRITER SERIES)에 연사로 초청받았다. 티스데일의 작품은 [HARPER’S], [THE NEW YORKER], [THE THREEPENNY REVIEW], [THE ANTIOCH REVIEW], [CONJUNCTIONS], [TRICYCLE]에 실렸다. 문학상 수상자로서 작가 경력 외에, 티스데일은 완화의료 분야에서 십 년을 포함해 간호사로 오랫동안 종사하고 있다. 현재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살고 있다.
좋은 죽음
좋은 죽음에는 흔히 가족과 친구, 삶을 되돌아볼 기회가 포함된다. 연방 정부는 좋은 죽음이란 "환자와 가족과 돌보는 사람이 피할 수 있는 고통과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환자와 가족의 바람에 전체적으로 조화되며, 임상적·문화적·윤리적 기준에도 상당히 부합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이런 규정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죽는 순간을 상상해보라고 하면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데 풀밭이나 빵 굽는 냄새, 사랑하는 사람의 따스한 손길 등 특정 경험에 집착한다면,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을 상정하는 것이다. 좋은 죽음을 규정하기보다는 죽음을 둘러싼 실상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게 낫다.
아울러 임종 과정을 어떻게 지원할지 논의해보는 게 낫다.
우리는 증상을 치료할 수 있지만 죽어가는 사람이 원하는 것만 지원해야 한다. 임종 과정은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주도해야 한다.
가족과 돌보는 사람은 자신의 바람이나 믿음을 강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버지니아 모리스는 이런 식의 죽음을 '명백한 죽음, 자주적 죽음'이라고 불렀는데,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퇴역 군인인 페리는 오랫동안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산과 들을 쏘다니며 사냥을 즐겼다. 그는 그런 삶이 무척 편했다. 말기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동물처럼 죽고 싶다"고 말했다. 대다수 사람에겐 자포자기한 말로 들리겠지만, 페리에겐 사슴이나 곰처럼 땅 위에서 홀로 조용히 맞이하는 죽음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페리는 숲까지 걸어갈 기운이 없었기에 집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는 통증이 아무리 심해도 약품 치료를 거의 다 거부했다. 임종을 몇 주 앞두고는 여느 사람들처럼 음식물을 거의 넘기지 못했는데,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도움마저 대부분 거절했다. 방광과 장의 퉁제력을 잃었을 때도 몸을 씻거나 옷을 갈아입거나 시트를 가는 등의 도움도 거절했다. 페리에겐 몸의 기능이 떨어지고 삶이 서서히 해체되고 소멸되는 것이 진정한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결국 재택의료팀 몇 명이 윤리위원회에 페리의 죽음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페리가 의사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그룹에 속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바람을 차분하고 또렷하게 밝혓다. 그것도 아주 여러 번. 나는 그의 선택을 존중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좋은 죽음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가 식구들에게 둘러싸인 채 한 사람씩 호명하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모습을 떠올인다. 하지만 그런 죽음은 흔치 않다. 만성질환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도 발작이나 출혈 등으로 한순간에 숨이 넘어간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도 말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질병이나 노령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은 거의 모두 마지막 며칠이나 몇 시간 동안 의식이 없다. 설사 있더라도 말을 못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몸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상태에서 조용히 떠나는 걸 상상한다. 흠, 그야말로 상상이다. 소위 좋은 죽음에 대한 이상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 죽음은 성공이냐 실패냐의 문제도 아니고, 성취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삶과 죽음은 소유물이 아니다. 죽음을 특정 방식을 띠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와 다를 땐 나쁘다고 판단할 것인가? 남들이 원하거나 계획한 방식을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마라. 어차피 혼자서 가야 할 길이다. 죽음의 가치는 남들의 생각에 달려 있지 않다. 내 죽음은 오로지 내 소관이며, 내 죽음의 가치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죽음이 우리 삶과 어울릴까? 우리가 살기 위해 애썼던 방식을, 살고 싶었던 방식을 죽음에도 반영할 수 있을까? 막연히 '좋은 죽음'을 바라지 말고, '적합한 죽음'을 고민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죽어가는 사람의 병상을 지킬 때는 당사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고통을 함께 나누게 된다. 아울러 안타까운 마음에 어떻해든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을 상대로 부모 노릇을 하려 든다. 큰일을 결정할 때도 그렇고("당연히 수술을 받아야죠!") 자잘한 일에서도 그렇다("입맛이 없어도 한술 떠야죠!"). 때로는 당사자의 바람을 무시하기도 하고, 당사자의 바람이 우리와 다르면 정도를 벗어났다고 간주한다.
부모처럼 돌보려는 마음에 자꾸 간섭하다 보면 환자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압박할 수 있다.
내 친구 캐롤은 오리건주 동부의 높은 사막 지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캐롤은 그 즈음 침대에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어떤게 캐롤에게 좋은 죽음일지 다 안다고 생각했다. 캐롤 부부가 손수 지은 주택 주변엔 전나무가 많았다. 깨롤이 널찍한 침대에 누워 눈 쌓인 전나무를 내다보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캐롤이 잠에 빠져드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눈만 그치면 당장에라도 언던 위에 자리 잡은 캐롤의 집으로 달려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캐롤은 이틀 뒤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의료진이 심폐소생술을 하는 와중에 끝내 숨을 거뒀다.
캐롤의 죽음은 내가 예상했던 죽음과는 달랐다.
집 대신 응급실의 형광 불빛과 소음 속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나는 캐롤의 죽음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교훈을 얻었다. 참으로 힘겹게 얻은 교훈이다. 캐롤은 살고 싶어 했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캐롤의 죽음에 상처를 받았다. 병원에 가겠다고 선택한 사람은 캐롤이었다. 자신이 죽어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기어이 도움을 청했다.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겠다고 선택했다. 하지만 나는 이기적이었다. 캐롤이 어떻게 죽으면 좋을지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환상이 현실에 부딪쳐 산산조각 날 때까지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것은 캐롤의 환상이 아니었다. 캐롤은 살고 싶어 했다. 살고자 노력하는 와중에 죽었다. 내가 어찌 함부로 그걸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캐롤이 그렇게 하겠다고 선택했는데···.
좋은 죽음과 관련된 대다수 정의에 의하면, 페리의 죽음은 좋은 죽음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줄곧 극심한 통증과 회한에 잠겨 있었으니 말이다. 의료진과 사회복지사 할 것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도 모두 괴로워했다. 페리는 자율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선의로 제공하는 치료마저 거부했다. 나는 페리가 죽음에 맞서 싸울 힘이 없음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알리려 했다고 생각한다. 페리는 몸을 이루는 원자가 다 소멸할 만큼 무기력한 상황에서 죽음에 순응하고 싶었던 것이다. 죽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할 게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세상의 온갖 계획과 지원과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가 당신에게 통제력을 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동물이고, 우리 몸은 기능을 상실한다. 우리는 죽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틸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페리는 자기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는 그의 죽음을 ‘자주적 죽음, 명백한 죽음’이라고 부른다. 좋은 죽음인 것이다.
의사소통
당신이 죽어가는 사람이라면 하고 싶은 말은 뭐든 해도 된다.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말이다. 반대로 입 꾹 다물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 내가 여기서 하는 말은 대부분 방문자와 동반자와 조력자에게 주는 조언이다. 그들에겐 몇 가지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가령 세탁기가 고장 났다거나 우유가 떨어졌다거나 주차 위반 딱지를 받았다는 등 일상적인 정보를 설명한다고 생각해보라. 다음으로 자동차가 망가졌다거나 전기가 나갔다는 등 조금 더 긴급한 소식을 전한다고 생각해보라. 목소리 톤이나 표정이 다를 것이다.
우리는 상황마다 각기 다른 양상으로 소통한다. 죽어가는 사람과 시간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엉뚱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감정적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두어야 한다. 미리 목록을 작성하자. 연습해서 안 될 게 뭐가 있겠는가!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사람은 '보호자'가 된다. 보호자는 중용과 프라이버시, 침묵과 웃음 등 일상생활에서 놓칠 수 있는 온갖 일들의 옹호자요, 죽어가는 사람의 요구를 들어줄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방문할 때는 가능한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좋다. 방문할 때마다 "한 시간 정도 머물 수 있어"라거나 "저녁때까지 있을께"라거나 "메리가 오면 일어날 거야"라고 미리 말해준다. 설정된 범위는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여유 공간을 제공한다. 아울러 떠날 때는 언제 다시 방문할지 알려줘라. 그래야 막연히 기다리지 않는다.
뭐든 물어보고 허락을 구해야 한다. 함부로 판단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 점에 대해서 미리 논의하라.) 당신 친구가 “그만 좀 물어봐!”라고 말할 때까지 계속 물어보라. 그날의 화젯거리를 바로 꺼내기 전에 친구에게 이야기를 나눌 기분인지 물어보라. 음악을 듣거나 장기를 두거나 TV 드라마 <워킹데드(원제: The Walking Dead)>를 보고 싶은지 물어보라. 샤워를 하고 싶은지,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라. 먹고 싶다고 하면,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니?”라고 묻지 말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줄까, 아니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줄까?”라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물어보라. 그래야 대답하기 쉽다. 늘 허락을 구하되, 허락하기도 하라. 슬퍼하거나 화내도 된다고 허락하라. 졸려하거나 지겨워해도 된다고 허락하라. 죽겠다고 하는 것만 빼고 뭐든 해도 된다고 허락하라.
죽어가는 사람을 상대할 때는 늘 솔직해야 한다. 환자에게는 물론이요, 당신 자신에게도 말이다.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말은 여기서도 통한다. 당신 자신에게 솔직해야 당신이 진심으로 줄 수 있는 것을 기꺼이 제공할 수 있다. 아픈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는 선에서 당신의 감정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라. 당신도 때로는 위로가 필요하고, 상황을 부정하거나 통제하고픈 충동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환자 앞에서 그대로 표출할 수 없어서 꾹 참아버린다.
당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참을 수 없을 땐 잠시 벗어나 있어야 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면, 그렇다고 인정하고 해소할 방법을 강구하라. (환자에게 당신 기분을 풀어달라고 하지는 마라.) 감정을 억누르는 것과 솔직하게 대하는 것 사이에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화가 나거나 눈물이 나올 때는 어느 정도 자제하려 노력하되, 완전히 숨길 필요는 없다. 반면 질투심과 짜증과 외로움 같은 감정은 환자 앞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해소해야 한다. “왜 나한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니? 나보다 그녀랑 더 친한 거니?”라는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이것들만 알아도 반은 해결된다. 나머지 반은 실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면서 대처하면 된다.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은 엉뚱한 문제를 일으켜 자신에게 닥친 난관을 잊거나 긴급한 문제를 회피하려 들기도 한다. 그들의 정신 연령은 일곱 살 아이와 같다. 과제를 다 했냐고 물어보면 우유를 쏟아버리는 아이처럼 심기가 불편하면 주의력이 흩어진다. 현실에 적응하고 이를 받아들이기까지 다양한 문제를 일으킨다. 어떤 이는 파괴적 행동을 하고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어떤 이는 훨씬 더 어렸을 때 했던 행동을 다시 하는 식으로 퇴행하기도 한다. 자기 행동에 책임지길 거부하고 다른 사람이 뒤처리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마냥 나무랄 수만은 없다. 우리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 닥치면 누군가가 대신 나서주길 바라지 않는가. 너그럽게 받아주되, 그런 행동이 습관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경계하라. 부모처럼 매사에 책임을 떠맡고 다 해결해주겠다고 하지는 마라. 환자가 진심으로 바라는 건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죽어가는 사람이 요청하지 않으면 완곡한 표현으로 사실을 은폐하지 마라. (물론 임종 간호(end-of-life care)라는 말도 죽음 대신 삶에 관심을 집중시킨다는 점에서 완곡한 표현이다. 삶의 끝자락에 제공되는 간호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만, ‘죽음’이라는 말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임종 간호’라는 문구를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함부로 약속하지 마라. 거짓말로 둘러대지도 마라. 거짓말을 할 때마다, 혹은 상황이 다른 척할 때마다, 당신은 신뢰를 잃는다. 의사도, 가족도, 환자도 모두 거짓말을 한다. 코리 테일러Cory Taylor는 흑색종으로 죽어가면서 이렇게 적었다.
“병원에선 누구 하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다들 치료에 대해 말한다.”
“너를 위해 기도할게”라고 말하지 마라. “이건 위기가 아니라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거야”라고 절대로 말하지 마라. 이런 말은 사이를 갈라놓을 뿐이다. 믿음과 신뢰, 선의와 헌신을 훼손할 뿐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절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서로의 생각을 속속들이 알고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이것도 다 하늘의 뜻일 거야”라는 말은 절대로, 절대로 하지 마라.
“내가 너라면···”이라고 말하지 마라. 당신 친구는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입장이길 바랄지도 모른다. 괜한 말로 위로하려 들지 말고 일상생활의 불편을 해소하고 계획을 수립하도록 도와주라. 그것도 당사자가 도움 받는 걸 수락했을 때만 나서라. 도와주겠다고 제안한 다음엔 입을 다물라. 환자는 도움 받을 준비가 됐을 때 그 제안을 수락할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라. 뭐든 다 알려고 하거나 보려고 하지 마라.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다 들으려고 하지도 마라.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
아픈 사람은 이미 자율성을 잃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고, 옴짝달싹못하는 상태로 각종 검사를 받아야 한다. 수치심과 두려움에 잔뜩 위축될 수밖에 없다. 자존감이 와르르 무너진 상태에서 당신에게 검사 결과를 얘기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에 한 마디도 답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땐 화제를 바꿔라.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사람 앞에서 "넌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었어"라고 말하는 우를 범하지 마라.
죽어가는 사람이 하는 말에 함부로 반박하지 마라. 자신의 감정 상태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통증 우려에 대해서, 치료 확신에 대해서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죽어가는 사람은 짜증을 내거나 침울하거나 위축되기 쉽다. 그렇다고 억지로 기분을 북돋우려 하지 마라. 그들은 진지한 대화를 시작했다가 금세 화제를 바꾸기도 한다. 똑같은 이야기를 자꾸 반복하기도 한다. 헤어질 때 작별인사를 거부하기도 한다. 방금까지 행복한 얼굴로 웃다가도 다음 순간 눈물을 쏟기도 한다. 자신의 병세보다 뉴욕 메츠 팀의 경기 결과에 더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자기 운명보다 드라마 주인공의 운명을 더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떠나지도 못할 휴가 계획을 세우고 나무를 심고 자동차를 사고 머리를 확 밀기도 한다. 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누구보다 어질고 명석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평온한 얼굴을 하다가 돌연 환자용 변기를 집어 던지기도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인생 경로를 바꿀 가능성도 있다. 지금까지와는 백팔십도 다른 사람이 돼서 생전 처음으로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들은 매 순간 죽어라 노력하고 있다. 당신도 그래야 한다.
마지막 몇 주
죽는 과정은 지루할 수 있다. 세상이 점점 좁아져 병실 크기도 줄어든다. 그 안에 갇힌 감정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 다들 살얼음판을 딛는 것 같다. 누군가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삼키지만, 누군가는 분위기를 띄우고자 아무 말이나 지껄인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다.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오만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나는 남편이 알코올중독자 협회 후원자가 됐을 때 버치를 처음 만났다. 버치는 추수감사절을 우리와 함께 보내기 위해 찾아왔다. 수십 년 만에, 어쩌면 평생 처음 일반 가정에서 즐긴 추수감사절 만찬이었을 것이다. 버치는 무장 강도짓으로 거의 30년 동안 감옥에서 보냈다.
성인기를 감옥에서 썩었으니 적립해둔 게 있을 리 없었다. 복지 혜택을 받고 싶어도 대부분 자격 미달이었다. 그러다 노숙자를 돕는 단체에서 간신히 일자리를 구했다. 일해서 받은 돈으로 작은 방을 하나 구했다. 클레오라는 이름의 흰색 고양이도 키웠다. 버치에겐 창문이 달린 방과 안아줄 고양이와 낚싯대가 전부였다.
감옥에서 나오고 몇 년 뒤, 버치는 간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도움의 손길을 모두 거절했다. 혼자서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고, 딱히 필요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나빠졌다.
남편이 몇 번이나 설득한 끝에 버치를 우리 집에 들일수 있었다. 그땐 이미 거동도 못하고 정신도 약간 오락가락했다.
나는 버치가 햇살을 듬뿍 받도록 창가에 침대를 두게 했다. 우리 집에 들어온 뒤로 버치는 줄곧 침대에 누워 있었다. 클레오가 늘 그의 발치에 웅크리고 있었다.
임종을 몇 주 앞둔 시점엔 몸이 몹시 피로해진다. 활력과 기력이 쭉쭉 떨어진다. 그러다 결국 죽는다. 생명의 기운이 다 없어지는 것, 그게 바로 죽음이다. 환자는 눈을 감기 전에 자질구레한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한다. (모험이 끝난 후, 피곤하지만 뿌듯한 기분을 맛보고 싶은 것이리라.) 그런데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남은 시간도 얼마 없다. 그러니 죽어가는 사람을 돕고 싶다면, 당사자가 처리하기 어려운 자잘한 일을 도와주라. 편지를 쓰거나 선물을 포장하는 걸 도와주라.
환자는 음식물을 점점 덜 먹고 덜 마시다가 결국엔 다 끊는다. 중증 치매에 걸려 수저로 떠먹여줘야 하는 사람도 어느 순간부터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린다. 음식을 그만 먹겠다고 선택하는 게 아니라 먹겠다는 욕구가 없어지는 것이다. 음식물은 우리를 계속 살아 있게 해준다. 배고픔과 갈증은 생체의 반사적 반응이며 건강한 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먹거나 마실 수 없을 때가 온다.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에서 고개를 돌린다면 죽어간다는 뜻이다.
소화도 천천히 진행되고 콩팥 기능도 효율성이 점점 떨어진다. 죽어가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처럼 음식을 소화할 수 없으며, 음료도 예전처럼 잘 처리할 수 없다. 삼키지 못해서 목에 걸릴 수도 있다. 그러니 음식이나 음료를 억지로 먹이지 마라. 안 먹는다고 조바심치지 말고 환자의 이를 닦아주거나 젖은 물수건을 입에 대주도록 하라. 환자가 잘 마시지 않으면, 가족은 정맥주사를 맞히고 싶어 한다. 상태가 괜찮을 때도 바늘을 꽂으면 성가시고 불편하다. 특히 자꾸 들썩이거나 자세를 계속 바꿔줘야 하는 환자에겐 정맥주사용 튜브가 거치적거린다. 환자에게 왜 자꾸 먹이려 하는가? 그러지 않으면 환자를 방치한다는 기분이 드는가?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음식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먹이는 게 오히려 문제다. 단순히 살고 싶지 않아서 음식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오래 지켜보면 자꾸 오그라드는 게 느껴진다. 살이 빠져서 수척해졌을 뿐만 아니라 몸에서 기가 빠져나간 것 같다. 생명력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갈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도 갈증을 느낄까? 배가 고플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임종을 앞둔 환자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아야 오히려 더 편안하다. 그들도 때로는 갈증을 느끼지만, 물이나 음료가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임종 환자가 일주일 이상 전혀 먹거나 마시지 않아도 갈증이나 통증을 호소하지 않고 오히려 평온하게 죽음을 맞는 모습을 간호사와 의사는 수도 없이 목격한다. 임상적으로 탈수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때로는 정맥 주사제를 맞은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
탈수 상태가 왜 도움이 될까? 환자는 억지로 먹으려 할 때마다 구역질이 나거나 통증을 느끼거나 호흡이 어려워질 수 있다. (식욕이 사라졌는데도 걱정하는 간병인을 기쁘게 해주려고 억지로 먹는 것일 수 있다.) 콩팥과 심장은 여분의 수분을 점점 더 처리하지 못한다. 조직과 복강에 수분이 쌓이면 배가 부풀어 오르고 부종이 생긴다. 탈수 상태가 되면 이런 증상이 어느 정도 완화되고 종양 주변도 덜 부풀어 올라서 통증이 줄어든다. 환자는 흔히 식음료를 끊은 뒤에 몸과 마음이 더 편해지고, 죽을 때도 더 평온하다.
그나저나 환자를 돌보느라 당신은 너무 지쳤다. 잠시라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어디 골방에라도 가서 숨을 돌리거나 근처 커피숍에서 차라도 한 잔 마실 여유를 누려야 한다. 누군가를 만나 하소연을 늘어놓거나 기분을 전환할 이야기라도 나눠야 한다.
당신은 딱히 해주는 게 없어도 환자를 혼자 두고 나갈 수 없다. 이럴 땐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당신도 뭐든 해줄 수 있다.
의사인 셔윈 눌랜드Sherwin Nuland는 생명 유지 장치와 생명 연장 치료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다들 굉장히 이기적이게 된다”고 말했다. 가족은 물론이요 의사와 간호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게다가 각자의 이기심에 따라 말하거나 조언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타인을 위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으려면, 상대를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당신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이별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병상에 누운 사람의 대리인이란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환자가 원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웃어라. 껄껄 웃어라! 노래하마. 마지막 입맞춤을 하고 마지막 꿈과 마지막 농담을 들려주라. 앞에서 나는 우리가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여러 가지 알려주었다.
임종을 코앞에 둔 시점에선 이렇게 말하라.
"사랑해요. 꼭 좋은 곳으로 가실 거예요.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평안히 가세요."
작가 데니스 포터 Dennis Potter는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그가 죽기 몇 달 전에 BBC와 했던 인터뷰는 주목할 만하다. 당신 포터의 아내 역시 유방암으로 투병 중이었는데, 포터가 직접 간병을 했다. 인터뷰 중에 포터는 느긋하게 웃으면서 특유의 냉소적 유머를 날렸다.
"이젠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포터가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묘사하며 말했다. “자두나무인데, 꽃잎이 꼭 장미 같아요. 하얀 장미. 예전엔 꽃잎을 바라보면서 ‘아, 꽃이 예쁘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글을 쓰면서 창밖을 내다보는데, 세상에서 가장 희고 가장 탐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꽃이 보이더군요. 이제야 그게 보이더란 말입니다. 세상 만물이 전보다 더 사소하기도 하고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의 차이는 별게 아닙니다. 다만 만물의 모습이, 순간순간 눈에 들어오는 그 모습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포터는 그 느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더러 직접 경험해보라고 덧붙였다.
“그 찬란함을 직접 경험해보십시오.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아, 물론 나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데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내 처지에 무슨···. 다만 현재를,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온전히 보라는 겁니다! 감탄이 절로 나올 겁니다.”
포터는 아내를 보내고, 9일 뒤에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
죽는 순간엔 자잘한 일이 수도 없이 벌어진다. 생명의 기운이 쇠하다가 완전히 고갈된다. 눈이 흐릿해지고 푹 꺼진 것처럼 보인다. 근육이 늘어지고 턱이 축 처진다. 피부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형체로 변한다. 수없이 쳐다봐서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낯선 타인처럼 보인다. 가면을 쓴 것 같다. 죽은 몸은 세상 어떤 것과도 같지 않다. 송장이요, 빈껍데기요, 뉴턴의 법칙에 대한 구체적 실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움직이는 상태의 몸이고 계속해서 움직이려 한다. 시신은 움직이지 않는 몸이다. 그것을 ‘영면(永眠)에 드신 몸(a body in repose)’이라고 부르는데, 영원히 잠들었다는 뜻이다. ‘repose’는 휴식이나 수면이라는 뜻이지만, 중세 영어에서는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놓는다는 뜻이었다.
죽음은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오랜 순간에 걸쳐서 이뤄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오랜 병마에 시달린 후에 찾아오는 죽음은 호흡을 통해 알 수 있다. 호흡이 불규칙해지면서 몇 초 동안 숨이 멎었다가 다시 돌아온다. 숨이 멎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그렇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결국 멎는다. 내가 봤던 어떤 사람은 1분에 네 번씩 쉬다가 세 번씩 쉬다가 한 번씩 쉬더니, 결국 호흡 중추의 마지막 명령으로 얕게 한 번 더 쉬고 세상을 떠났다. 숨이 완전히 멎은 뒤에도 몇 분 동안 뇌에서 델타파가 발생한다는 흥미로운 증거가 드물게 나온다. 그래서 죽은 뒤에도 희미한 전기 신호가 눈꺼풀이나 입술에 미세한 경련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게 마지막 호흡일까?
우리의 통념은 이렇다. 사람은 심장 박동과 호흡이 멎으면 죽는다. 산소 호흡기를 장착한 사람의 사망 시간은 기계를 끄고 심장이 멈췄을 때라는 데 다들 동의한다. 하지만 때로는 뇌사 상태여서 사람이라 칭할 만한 게 남아 있지 않다고 보고 기계를 끄기도 한다. 몸은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계속 활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다시는 작동할 수 없는 상태에서 멈춰버리면, 다시 말해서 (숨을 쉬려는 반사적 욕구로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살고자 하는 충동이 사라지면, 우리는 죽었다고 말한다. 복합 시스템(system of systems)으로서 몸의 조직이 와해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지막 숨을 쉬고 나서 사망할까? 아니면 마지막 심장 박동이 뛰고 나서 사망할까? 그도 아니면 마지막 뇌파가 번뜩이고 나서 사망할까? ‘예, 아니요, 아마도?’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사망 시간을 결정할 땐, 임상적 합의 못지않게 사회적 합의도 중요하다.
우리는 매 순간 죽고, 매 순간 새로운 자아로 거듭난다. 내가 두려워할 때는 이 제한된 자아, 즉 육체와 정신의 혼합체인 자아,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아가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변화의 큰 파도에 대한 내 통찰은 눈을 번쩍 뜨고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일순간 바라본 것과 같다. 그러한 통찰은 사물이 어떻게 딱딱 들어맞는지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한다. 그러한 순간에 내가 경험한 것은 다른 종교를 믿거나 종교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술한 경험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것들을 단순히 신념 체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건 어리석다.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선택한 말은 우리가 관심을 둔 구체 표면에 한 낙서 또는 채색과 같다. 죽음에 다가가면 우리의 모든 근원적 믿음이 분명해진다. 인간의 삶을 둘러싼 것(인간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공간과 인간의 삶을 넘어서는 더 위대하고 영원한 무언가)에 대한 자각도 명확해진다. 나는 이제 패기 넘치던 청년기의 불안과는 완전히 다른 대지에 굳건히 서 있다.
시인 마리 하우Marie Howe는 죽음의 순간을 어떤 것의 종료나 중단이 아닌 완성으로 여긴다. 삶의 총결산인 셈이다.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난 뒤에 맛보는, 피곤하지만 뿌듯한 느낌에 대한 영원한 기억이요, 예전엔 미처 몰랐던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나는 50년 전의 내가 아니다. 10년 전의 나도 아니고, 작년이나 어제의 나도 아니다. 나는 이 문장을 썼던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내가 죽을 것인가? 모든 것이,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변하는 이 순간은 그 어느 순간보다 미스터리하고 강렬하다.
애도
우리는 충격에 빠진다. 있지도 않은 잔을 집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허공만 가른다. 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두 팔을 허우적거린다. 열쇠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열쇠가 없다.
‘어, 뭐지?’
애통(grief)은 바로 ‘어, 뭐지?’ 하면서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상태이다. 너무나 익숙했던 것이 사라졌다.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나눴던 일상까지 전부 다 사라졌다. 내가 이걸 하면 넌 저걸 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넌 저렇게 대답했는데. 손을 뻗으면 늘 거기 있었는데. 이젠 손을 뻗은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진실이 거짓으로 변했다.
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캐롤과 통화했고, 이틀 뒤에 일터로 복귀해야 했다. 크리스마스 연휴인데도 캐롤을 찾아가지 못했던 바로 그 폭설 때문에 클리닉도 문이 닫혔다. 나는 의사인 토니와 함께 그의 픽업트럭을 타고 가정 방문에 나섰다. 환자의 집 앞에 주차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캐롤의 이름이 떠서 얼른 받았다.
“캐롤이 떠났어요.”
데이비드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곧이들리지 않았다.
‘캐롤이 거기 있는데 무슨 소리예요?’
데이비드가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호흡 곤란. 눈길을 뚫고 병원에 달려간 것. 응급실. 나는 트럭에서 내리며 눈밭에 풀썩 쓰러졌다.
그날까진, 이렇게 갑작스러운 아픔을, 살갗이 찢기는 것 같은 아픔을 맛보기 전까진 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걸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느껴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며칠간 의식이 없었기에 나는 이미 어머니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도 무너지긴 했지만 그때는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지지 않았다.
애통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은 일이 자꾸만 벌어진다. 다 거짓말처럼 느껴지고 약을 먹은 것처럼 멍하다. 흔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차분하거나 흥분하거나 격분하기도 한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병수발을 하느라 수주에서 수개월 동안 병원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일이 다 끝났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안도감을 느낀다는 사실에 놀라 죄책감에 휩싸인다. 너무 혼란스럽다.
잘 굴러가던 일상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다.
내가 종양학 병동에서 일하던 어느 날 밤, 남태평양의 섬나라 통가 출신의 한 노부인이 환자로 들어왔다. 그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날이 밝자 친척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스무 명 남짓한 통가인이 근황을 주고받으며 수다를 떨었다. 맥도날드 햄버거를 사와서 나눠 먹기도 했다. 내 환자는 눈을 감고 말없이 누워 있었다. 그날 밤, 간호사실에서 사무를 보는 내게 젊은 여자가 다가와 말했다.
“아무래도 떠나신 것 같아요.”
나는 노부인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댔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호흡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잠시 기다렸다가 병실에 꽉 찬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운명하셨습니다.”
한탄이 사회적 경험이라는 사실을 그날처럼 생생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고인의 자매, 사촌, 조카 등 일가친척들이 한 사람씩 침대 옆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몇 분 동안 큰 소리로 울었다. 그들은 한바탕 울고 나서 뒤로 물러나 또다시 웃고 떠들며 음식을 나눠 먹었다. 병실에 모인 사람들이 그 의식을 다 치르기까지 몇 시간이 걸렸다.
나는 죽음의 중대성을 인정하는 그런 의식을 높이 평가한다. 아울러 개인적으로 슬픔을 덜 느끼는 먼 친척도 그런 의식에 동참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통곡하고 싶었다. 거울을 죄다 가려놓고 몇 달 동안 검은색 옷만 입고 싶었다. 제임스 윌스는 핀란드인의 통곡이 “전형적이고 현대적이며 신교도다운 방식은 아니다”라고 콕 집어 지적한다. 우리 집안사람들이 딱 그런 식이다. 두건을 눌러 쓰고 입을 꽉 다문 채 내색하지 않는다.
애도 카운슬러 존 제임스와 러셀 프리드먼은 ‘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세 살 난 딸이 죽으면서 겪은 제임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프로그램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애통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진단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 다르게, 더 나은 방식으로 벌어지길 염원하고, 미래의 실현되지 않을 희망과 꿈과 기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불건전한 관계나 갑작스러운 죽음에서는 물론이요, 건전한 관계나 예견된 죽음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관계가 완전히 마무리되지 못하고 중간에 정지됐기 때문이다. 애통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혹은 더 나은 어제’를 내려놔야 한다고 제임스와 프리드먼은 강조한다.
어머니가 떠난 뒤 나는 애통한 마음에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벗어났다. 제임스와 프리드먼은 우리에게 죽은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든 정리하라고, 피하지 말고 부딪치라고 권한다. 나는 그들의 권유대로 틈만 나면 어머니에게 말하고 사진을 들여다보고 편지를 읽었다.
그러자 우리 관계가 점차 좋아졌다. 우린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실은 싸울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어머니는 가만히 듣기만 했으니까. 몇 년이 지나고, 몇 십 년이 지나면서 어머니와 나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실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애통은 다른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갈 기회이다. 애통은 마지막 숨을 거둔 후에 내쉬는 또 다른 숨이다.
"이보다 더 좋았던 적이 없었다."
-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시니어 Douglas Fairbanks Sr. 의 마지막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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