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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신친일파 반일 종족주의의 거짓을 파헤친다

by 욕심쟁이77 2020.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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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희열에서 본적이 있다.

한국패널들이 일본을 비판하는데 호응해주고 일본사람이 그러기 쉽지 않다.

우연치 않게 독도를 접하게 되고 독도를 연구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국으로 귀화한 일본인이다.

[반일종족주의] 이영훈외 집필한 책의 반대책이라고 할까....일단 두 책을 다읽어봐야 내생각이 정리 될것 같기는 핟.

당연 한국사람에게 일본 식민지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사실 그시대를 살아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일제 36년이라고 했던가. 일제 1년차에 태어나 독립되기전에 살던 36살 조선인은 조선사람인가 일본사람인가...... 할아버지를 보면 일본말도 할줄 알았다고 한다. 역사를 배워 당연 일제 식민지는 우리에게는 치욕적인 나날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린 과연 그지경이 되었을때 까지 무얼 하고 있었을까...과연 조선이라는 나라가 우리의 역사에서 칭송받아야할 역사인가....물론 역사를 배워야 대비를 할수는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행태를 보면 배우기는 커녕 또다른 식민지를 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이제부터라도 좀 잘 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가능성이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무구한 역사를 지내왔지만 중국, 일본, 그리고 미국 어느나라에도 속해있지 않고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잘모르겠다 일본인의 마음.....

예전에 전남대 미즈노 교수가 생각난다.

같이 이야기 할수는 현재시점에서는 없겠지만.. 그래도 대화의 희열 프로를 좋아했던 관계로 한번 읽어보기로 했다.

호사카 유지

1956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교 공학부 졸업 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한일관계 연구를 위해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 체류 15년 만인 2003년 대한민국으로 귀화했다. 2011년 독도 공로상, 2013년 홍조근정 훈장, 2018년 독도평화대상 특별상 등을 받았다.

외교부 독도정책위원회 자문위원과 독립기념관 비상임이사, 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 KBS 객원 해설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 경상북도 독도위원회 위원,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상임이사,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편집위원, 동아시아일본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대한민국 독도 교과서』, 『독도, 1500년의 역사』,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자료집 1』, 『대한민국 독도』, 『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 등이 있다.

현재 세종대학교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 독도종합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책 [반일 민족주의]의 정체

이상과 같이 원고 4명의 피해는 개별적으로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헌병이나 경찰의 감시에 시달리면서 일하지 않거나 도망치다 잡히면 심한 폭행을 당했고, 휴가 등의 자유가 제한되는 등 사실상 노예 상태에 있었다. 둘재는 고된 노역으로 위험에 노출되었고, 크게 다친 사람이 있었다. 셋째는 강제로 저축한 돈을 돌려받지 못했거나 임금 자체를 받지 못했다.

제1부 강제징용 문제에 있어 악마는 어디에 있는가

제1장 조선인들이 강제연행된 일본 탄광의 실상

죄수를 광부로 사용한 일본 탄광

일본 탄광에서의 노무관리 실태

미이케탄광 폭동 사건과 다수의 도주자

미이케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

1910년~1912년에는 고용한 노동자들과 거의 같은 수의 광부들이 퇴직했는데, 퇴직 이유의 약 80%가 도주였다. 취업할 때의 이야기와는 달리 저임금에다, 노동 조건 역시 여전히 열악했기 때문이다.

여러 증언으로 집단적 연행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부상이 일상적이었고 일을 쉬면 식사량이 줄어들었다는 점, 탄광 측이 조선인을 심하게 구타하는 등 폭력적으로 관리했다는 점, 조선인들은 강제로 저축해야 했다는 점, 장시간의 과중 노동으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도주하는 조선인들이 속출했다는 점 역시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노예 사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장 강제징용의 진실은 무엇인가

조선인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계보

강제연행을 자발적인 선택으로 왜곡하는 이우연

‘관 알선’이라는 강제연행

조선인들의 도주는 노무 동원이 자발적이었다는 증거?

『특고월보』가 증명한 조선인 노무자 혹사와 학대

조선인들이 저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한 차별 구조

탄광에서의 작업상 민족차별을 부정할 수 있는가

임금 차별은 없었는가

가족 송금과 조선인 탄광부의 임금 수준

애당초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다

'모집' 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 관헌에 의해 각각의 도, 군, 면에서 강제적으로 조선인을 공출햇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으로 송출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기업에서 저축이 강제되었는데, 그들은 그 저금을 거의 돌려받지 못했다. 일본 기업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저축을 강제한 이유는 그들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의 목적은 그 지역 은행의 예금액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모집', '관 알선' 기간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을 혹사하거나 확대한 책임은 주로 기업에 있었다. 기업이 직접적으로 조선인들을 관리했기 때문이다. 혹사와 학대는 기업의 자본 축적 방법이나 노무관리 방침과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 등에 대한 혹사와 학대를 상징하는 것은 기업의 노무계에 의한 폭행과 살해였다.

전체의 71.5%에 달하는 숫자다. 그러므로 1940년 이후 후쿠오카현으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중 71.5%가 애국저축과 강제저축을 돌려받지 못했고, 도주한 사람은 보통저축마저 돌려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일본 우파 논리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정신 상태는 구제하기가 어렵다. '노예근성'이 정신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기업이 판결을 지키지 않는다면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해 현금화한 뒤 피해자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그것만이 답이다. 한국 측의 판결 결과 집행에 대해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을 다시 시작한다면, 그 결과는 일본의 국제적 고립으로 이어질뿐이다.

제2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최전선 성노예 제도

제1장 위안부 관련 문서의 중요 부분을 은폐하는 사람들

미군의 ‘위안부’ 심문 보고서 원문의 중요 부분을 은폐해도 되는가

동남아 위안소와 조선인 위안부들

결국 돈문 주면 성노예로 삼아도 된다는 논리는 돈이 가장 가치가 있으니 다른 것은 눈감아줄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 배금주의의 발상이다. 이영훈은 '반일 종족주의'의 본질은 물질만능주의라고 스스로 비판하는데, 그의 견해가 물질만능주의 그 자체다.

아무도 자발적으로 가지 않는 최전선에 일본군과 조선총독부가 선정한 포주들이 조선인 여성들을 취업 사기로 속여서 연행햇다는 사실이 조선이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 게 아니라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제2장 그릇된 ‘위안부’ 논리를 해부하다

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생겼는가

일본군 ‘위안부’의 본격적 동원의 계기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 공창제와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동원 시스템

감금 상태에 놓인 일본군 ‘위안부’

공녀와 공창제 그리고 ‘위안부’

호주제 가족 윤리와 성문화가 위안부 제도로 연결되었는가

원래 매춘부였던 여성들을 전쟁터로 보냈는가

해방 후 한국의 위안부

기지촌 여성과 일본군 ‘위안부’

위안부 한 명 앞에 80~100명의 병사가 줄을 서 있었다. 미즈키는 회상한다. 병사들도 지옥이었지만, '위안부' 에게는 그 이상의 지옥일 것이라고. 더욱이 민족이 다른 오키나와 여성이나 조선인 여성들은 얼마나 끔찍한 지옥이었을까.

일본 우파는 일왕이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신이고, 1945년까지의 대일본제국은 죄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문제는 합법이었고, 난징 대학살 같은 사건은 허위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일본식 '신도 종족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일본의 우파이자 역사 수정주의자들이다. 그런 일본의 우파와 같은 주장을 하는 한국인들이야말로 '친일 종족주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은 단어 하나만 바꾸면 자신들에게 딱 들어맞는 명칭을 스스로 만드러낸 셈이다.

제3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옥주가 알려주는 ‘성노예’의 실태

방패사단 ‘위안부’였던 문옥주에 대한 왜곡

위험 지역에서 탈출한 문옥주

군속으로 근무한다는 감언에 속아 버마로

최전선 아카브에서의 ‘위안부’ 생활

조선으로의 귀국을 중지한 문옥주

랑군회관으로 돌아간 문옥주

군법회의

해방 후의 문옥주

이영훈이 왜곡·은폐하는 문옥주의 진심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의 전쟁범죄

속아서 혹은 납치당해서 전쟁터로 끌려간 '위안부'들은 도망칠 수가 없었고, 귀국할 때는 군의 허가가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전차금을 상환했거나 계약 기간이 끝난 '위안부'들은 귀국을 허가받았으나, 계약 기간 중에는 위안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허가를 받아 쇼핑한 적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행동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도망칠 수 없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되었다. 전차금에 묶여서 본인의 의사에 반한 매춘을 강요당했는데, 성노예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공창제가 아니라 형법 제226조를 어기고 약취, 유괴에 이루어진 일본 정부, 일본군, 조선총독부가 전쟁 당시 저지를 형사 범죄다.

제4장 『반일 종족주의』의 ‘위안부’ 관련 주장 비판

위안부 인원수에 문제 있음

일본군 ‘위안부’의 총수 문제

요시다 세이지에 대해

과연 성노예였던가?

해방 후 위안부 문제는 40여 년 동안 없었는가

정대협을 공격하는 주익종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첫째, 조선인이나 대만인 등 일본 민족이 아닌 타민족을 해외의 침략 지역이나 격전지에 배치했다. 조선의 공창제나 해방 후의 사례는 모두 조선/한국 내에서 같은 민족인 한국 여성만을 동원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타민족에 차별적인 고통을 주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둘째, 일본군은 생명의 위험이 큰 해외 최전선에 주로 조선인 여성을 배치했다. 일본인 여성들은 보다 안전한 후방부에 배치했다는 점에서 조선 여성들의 목숨을 매우 경시한 잘못이 있다. 실제로 적군의 폭격 등으로 많은 조선인 위안부가 목숨을 잃었다.

셋째, 일본군 '위안부'들은 공창이 아니었다. 일본군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포주와 '위안부'가 직접 계약하게 했으며, 실제로는 일본군이 위안소의 모든 것을 통제했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항상 총칼을 들고 다니는 일본군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늘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한국의 신친일파는 일본이 제대로 사죄를 하고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인정했을 때, 그 후에 전개될 진상 규명으로 자신들이나 선조의 친일 행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그런 부류나 신친일파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제3부 ‘반일 종족주의 상징물’에 대한 거짓말

제1장 독도에 대한 거짓 주장들

독도에 대한 무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우산도는 독도

조선고지도와 안용복 사건

신경준과 조선의 독도 인식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관한 황당무계한 거짓말

석도가 독도다

일본의 독도 편입과 울도군수 보고서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인 증거

러스크 서한과 독도

이승만 라인과 현재의 독도

이영훈의 독도 인식의 잘못

일본은 독도 문제를 역사적 사실까지 왜곡해가며 일본식 종족주의로서 교묘하게 거짓말을 만들어 미국에 끊임없이 로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영훈은 알고 있을까?

제2장 상징물 등에 대한 기타 이야기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지 않았다

먼저 위안부 합의를 깬 자는 일본이다

한국에는 한국법이 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일본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자국을 침략한 나라를 옹호해주고 이상한 논리로 침략국을 감싸는 데도 그것이 옳다고 한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친일파 청산은 국가의 존망과도 연결된다. 친일 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신칠일파의 잘못된 사상도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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