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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숨결이 바람 될 때"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by 욕심쟁이77 2021.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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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폴 칼라니티

저자 폴 칼라니티는 1977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과 생물학을 공부했고,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문학과 철학, 과학과 생물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그는 이 모든 학문의 교차점에 있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과학과 의학의 역사와 철학 과정을 이수한 뒤 예일 의과 대학원에 진학해 의사의 길을 걸었다. 졸업 후에는 모교인 스탠퍼드 대학 병원으로 돌아와 신경외과 레지던트 생활을 하며 박사 후 연구원으로 일했다.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미국 신경외과 학회에서 수여하는 최우수 연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고의 의사로 손꼽히며 여러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는 등 장밋빛 미래가 눈앞에 펼쳐질 무렵, 암이 찾아왔다. 환자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 오던 서른여섯 살의 젊은 의사가 하루아침에 자신의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의사이자 환자의 입장에서 죽음에 대한 독특한 철학을 보인 그는 힘든 투병 생활 중에도 레지던트 과정을 마무리하는 등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약 2년간의 투병 기간 동안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가(HOW LONG HAVE I GOT LEFT?)’, ‘떠나기 전에(BEFORE I GO)’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각각 [뉴욕타임스]와 [스탠퍼드메디슨]에 기고했고, 독자들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15년 3월, 아내 루시와 딸 엘리자베스 아카디아 등 사랑하는 많은 사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무엇보다 칼라니티의 죽음이 너무나도 아쉬운 것은, 그가 가나안 땅에 거의 도착했는데 막상 그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경외과 수련의로서 탁월한 기량과 성취를 보였기 때문에 스탠퍼드 교무국장은 그를 모교의 신경외과 전문의 겸 교수로 채용할 뜻을 내비쳤고, 전국의 유명의과대학들은 지금보다 6배나 높은 연봉을 주면서 채용하겠다고 제안했으며, 투병 중에 어린 딸 케이디까지 얻었는데, 이런 완성 직전의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한탄스러웠겠는가."

1부_ 나는 아주 건강하게 시작했다

나는 결코 의사가 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내가 아는 의학이란 부재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의 부재. 내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돌와와 식은 음식을 데워 먹었다.

아버지는 환자들에게 아주 헌신적이었고, 덕분에 곧 지역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늦은 밤이나 주말에야 얼굴을 보는 아버지는 부드러운 애정과 차가운 근엄함을 함께 보여주었다. 우리를 안고 볼에 입을 맞추며 해주는 말이 어찌나 냉정하던지. “최고가 되는 건 아주 쉬운 일이란다. 최고인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보다 1점만 더 받으면 돼.” 아버지는 부성애도 농축해서 발휘할 수 있는 거라고 나름의 타협점을 찾았던 것 같다. 그런 결과는 짧고 강렬한, 진심 어린 애정의 폭발이었다. 다른 아버지들은 어떻게 자식들을 대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만약 이것이 의사가 치러야 하는 대가라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스탠퍼드 대학원의 리처드 로티 교수에게서 배웠다. 당대 최고의 철학자로 인정받는 그의 지도를 받으며, 모든 학문 분야란 인간의 삶을 특정 방향으로 이해하는 일련의 도구, 즉 어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관점을 갖게 되었다.

학위 논문을 마치면서 나는 문학 공부를 계속하려는 열망이 사그라짐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문학 연구의 관심사가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반과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물학, 도덕,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곳은 어디인가? 라는 질문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축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드러운 가을바람이 불어왔고, 내 생각은 제멋대로 흘러갓다.

갑자기 모든게 분명해졌다. 비록 아버지, 삼촌, 형이 모두 의사지만(혹은 그래서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의학 분야를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휘트먼도 의사만이 진정으로 '생리적·영적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의예과 지도 교수를 찾아가 향후 계획을 상담했다.

이 길은, 책에는 나오지 않는 답을 찾고 전혀 다른 종류의 숭고함을 발견하며, 고통받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할 수 있는 기회였다.

도덕적인 명상은 도덕적인 행동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나는 영국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일 의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처음으로 시체를 해부할 때 묘한 기분이 들 것 같지만, 기이하게도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를 바 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목덜미로부터 허리의 잘록한 부분까지 처음으로 절단하는 순간은 절대로 잊을 수 없다. 메스는 아주 날카로워서 피부를 자른다기보다는 지퍼를 여는 느낌이 든다. 피부가 열리고 그 아래에 숨겨진 금단의 힘줄이 드러나면, 단단한 각오가 무색하게도 불시에 무안함과 흥분을 느끼게 된다. 의대생의 통과 의례인 시체 해부는 지극히 신성한 영역을 침범하는 작업이기도 해서, 혐오감, 흥분, 욕지기, 좌절감, 경외감 등 무수한 감정을 자아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단조로운 수업 과정의 하나가 된다.

시체 해부는 엄숙하고 경건한 학생들이 냉정하고 거만한 의사로 변화하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푸른 기를 살짝 띤 채 부풀어 오른 내 첫 시체를 보았을 때, 그는 확실히 죽어 있었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이기도 했다. 앞으로 넉 달 안에 이 시신의 머리를 쇠톱으로 이등분해야 한다는 것이 왠지 양심에 걸리는 일로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 곁엔 해부학 교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시체의 얼굴을 한번 잘 보고 천을 덮어두면 작업이 한결 쉬울 거라고 조언했다.

얼굴을 천으로 덮어놓고 이름도 모른 채 해부 실습을 했지만, 그래도 시신에게서 인간성이 갑자기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맡은 시체의 위를 절개하여 열었다가 채소화되지 않은 모르핀 알략 두 정을 발견한 적이 있다. 생전에 그는 홀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며 약병의 뚜껑을 더듬어 이 약을 꺼냈을 것이다.

해부실 환경을 잘 아는 사람들, 즉 의사들은 사체 기증을 거의 하지 않는다.

해부실에서 우리는 시체를 하나의 사물로 대상화하여, 문자 그대로 장기, 조직, 신경, 근육으로만 바라보았다. 실습 첫날, 나는 시체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을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지의 피부를 벗겨내고, 작업을 방해하는 근육을 가르고, 폐를 꺼내고, 심장을 잘라서 열고, 간엽을 제거하고 나면 이런 조직 더미를 인간으로 인식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해부를 단순한 악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시체 해부뿐아니라 모든 의학은 신성한 영역을 침범한다. 의사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환자의 신체를 침입해 들어간다. 그리고 환자의 가장 취약하고, 가장 신성하며, 가장 은밀한 부분을 들여다본다.

신체를 물질이자 구조로 보는 것과 인간의 극심한 고통을 줄이는 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나는 스탠퍼드에서 영문학을, 케임브리지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하며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눌랜드의 책을 비롯해 여러 기록들을 보니 죽음이란 직접 대면해야만 알 수 있는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죽음의 두 가지 수수께끼인 경험적인 징후와 생물학적인 징후, 즉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철저히 비개인적인 측면들을 파헤치기 위해 의학을 탐구했다.

의과 대학원 4학년이 되자 많은 동기들이 방사선과나 피부과 같은 덜 고된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어리둥절해서 다른 유명 의과 대학원의 경우는 어떤지 알아봤더니 별로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근무 일정이 좀 더 여유롭고 연봉은 더 높고 스트레스는 덜한, ‘느긋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전공 분야로 눈을 돌렸다. 입학 논술에서 그들이 내세웠던 이상주의는 물러지거나 아예 사라졌다.

실제로 99퍼센트의 사람들이 연봉, 근무 환경, 근무 시간을 고려하여 직업을 선택한다. 그러나 원하는 생활방식에 중점을 두고 선택하는 건 직업이지, 소명이 아니다.

모든 뇌수술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본질인 뇌를 조작하며, 뇌수술을 받는 환자와 대화할 때에는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더해 뇌수술은 대개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며, 그래서 인생의 중대한 사건들이 그렇듯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처럼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요점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 가령 당신이나 당신의 어머니가 몇 달 더 연명하는 대가로 말을 못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치명적인 뇌출혈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낮은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시력 손상을 감수해야 한다면? 발작을 멈추려고 하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된다면? 당신의 아이가 얼마만큼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게 될까? 뇌는 우리가 겪는 세상의 경험을 중재하기 때문에, 신경성 질환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가차없이 완벽을 추구하는 신경외과의 소명의식에 이끌렸다.

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서였다. 신경외과는 뇌와 의식만큼이나 삶과 죽음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아주 매력적인 분야였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찮은 물질주의, 쩨쩨한 자만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 문제의 핵심, 진정으로 생사를 가르는 결정과 싸움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곳에서 어떤 초월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신경외과 레지던트의 일과는 보통 새벽 6시에 시작해서 수술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니까 수술실에서 얼마나 손이 빠른가에 따라 근무 시간이 결정되는 것이다.

레지던트의 수술 기량을 판단하는 기준은 기술과 속도다.

수술실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눈이 시계로 향해 있다. 우선은 환자를 위해서다. 마취 시간 안에 수술을 끝내야 한다. 수술이 길어지면 환자의 신경이 손상되고, 근육이 약해지고, 신장이 망가질 수 있다. 그리고 수술을 빨리 끝내는 것은 수술실 안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오늘 밤엔 언제 이곳을 나가게 될까?

나는 레지던트 생활의 정점에 올랐다. 핵심적인 수술은 대부분 통달했다. 연구 성과로 권위 있는 상을 여러 개 받았다. 나를 채용하고 싶다는 제안이 전국 곳곳에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탠퍼드 대학은 신경 조정 기법에 주력하는 신경외과의 겸 신경과학자를 찾기 시작했고, 그 자리는 내 관심사에 딱 들어맞았다.

생물학, 도독, 삶, 그리고 죽음의 개별적인 가닥들이 마침내 서로 엮이기 시작하는 듯했다. 완벽한 도덕 체게는 아니더라도 일관성 있는 세계관이 잡히고 그 안에 내 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우리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살고, 숨 쉬고, 대사작용을 하는 유기체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죽음은 당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2부_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 마라

CT 촬영 결과는 여전히 컴퓨터 화면에 떠 있었고, 의사로서의 내 정체성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암은 여러 내장 기관들에 침투해 있었고 진단은 명확했다. 병실은 조용했다. 루시는 날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재혼하라고, 그녀가 혼자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담보대출을 이자가 더 낮은 곳으로 당장 바꿔야 한다는 말도 했다.

내 인생의 한 장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책 전체가 끝나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사람들이 삶의 과도기를 잘 넘기도록 도와주는 목자의 자격을 반납하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이 되었다. 내 병은 삶을 변화시킨 게 아니라 산산조각 내버렸다.

한 주의 대부분을 병상에 누워 암 치료를 받으면서 나는 눈에 띄게 허약해졌다. 내 몸과 거기에 속한 내 정체성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한 무더기의 새로운 진통제가 처방되었다. 병원에서 절뚝거리면서 나올 때, 불과 엿새전만 해도 수술실에서 거의 36시간 가까이 서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의아스럽기만 했다. 한 주만에 이렇게 병약해진 건가?

이렇게 내 건강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으니 나는 환자, 신경외과학, 선의 추구라는 책무에서 벗어나게 된 걸까?

환자들을 돌봐야 한다면서 나를 몰아붙이던 그 의무가 사라지자 나 자신이 어느새 병약자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마치 있는 힘을 다해 결승선을 통과한 후 쓰러지는 달리기 선수처럼.

나는 앚아서 의과 대학원 시절 루시와 함께 찍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는 춤을 추며 웃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고 있자니 너무 슬펐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존재인지도 모르고 함께할 인생을 계획했다.

의학적으로 불투명했던 부분이 서서히 뚜렷해지고 있었다. 최소한 이제는 관련 문헌을 파고들 수 있을 정도의 정보는 갖고 있었다. 수치들은 불분명했지만, EGFR 변이가 있으면 평균적으로 약 1년의 삶을 더 얻을 수 있고, 장기 생존할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변이가 없으면 2년 안에 죽을 확률이 80퍼센트였다. 이 경우에는 남은 삶을 재정립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다음 날, 루시와 나는 정자은행에 들렀다. 생식 세포를 보존하여 건강한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원래 내 레지던트 생활이 끝나면 아기를 가질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암 치료제들이 내 정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혹시나 아기를 가질 거라면 치료 전에 정자를 냉동해두어야 했다.

정자은행 직원이 우리에게 두 사람 중 한 명이 '사망하면' 정자의 법적 소유권자를 누구로 하겠느냐고 묻자 루시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자은행을 떠나 집으로 왔을 때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치료 가능한 변이(EGFR)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화학 요법을 받는 대신 작은 흰색 알약인 타세바를 복용하게 되었다. 나는 이내 힘이 솟기 시작했다. 그게 뭔지 정확히는 몰라도 한 조각의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삶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가 살짝 걷히고 푸른 하늘 한 점이 보였다. 그 뒤로 몇 주 동안 식욕이 돌아왔다. 다시 체중이 늘었다. 그러면서 여드름이 심하게 났는데, 이는 약효가 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었다. 루시가 늘 좋아했던 내 매끈한 피부가 우툴두툴해졌고, 혈액 희석제 때문에 피부에서 계속 피가 났다. 내 신체에서 그나마 자랑할 만한 매력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외모가 다소 추해지더라도 살아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에마는 격주로 나를 진료했는데, 첫 진료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의학적인 문제("발진은 어때요?")에서 실존적인 문제로 넘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암 진단을 받으면 일을 아예 그만둬요. 아니면 정반대로 일에 몰두하거나요.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에마가 말했다.

“저는 40년의 인생 계획을 짰었어요. 첫 20년은 외과의사이자 과학자로, 마지막 20년은 작가로 살 생각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마지막 20년에 들어서게 됐으니,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할지 난감하네요.”

“음, 제가 그 답을 드릴 순 없겠죠.” 그녀가 말했다. “원한다면 수술실로 다시 복귀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밖에 못 드리겠네요. 하지만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꼭 생각해보세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면 쉬울 텐데요. 2년이 남았다면 글을 쓸 겁니다. 10년이 남았다면 수술을 하고 과학을 탐구하겠어요.”

병원에서 쌓은 경험 덕분에 나는 의사 겸 과학자로서 관련 자료를 분석하고, 그런 자료가 내 예후에 대해 전부 다 알려줄 수 없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환자인 내게 그런 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런 자료는 루시와 내가 아기를 가져야 할지, 혹은 내 생명이 꺼져가는 동안 새로운 생명을 양육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에마와 만나는 날들을 고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진료실에 있으면 본래의 나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료실 밖으로 나오면 내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일에서 손을 놓았기 때문에 신경외과 의사이자 과학자이며 전도유망한 청년이라는 정체성을 느낄 수가 없었다. 쇠약해진 몸으로 집에만 있으니 루시에게 남편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 나는 내 삶의 모든 문장에서 주어가 아닌 직접 목적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에마의 진료실에 가면 루시와 나는 농담을 하고, 의사들끼리 쓰는 말을 주고받았으며, 꿈과 희망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두 달이 지난 후에도 에마는 예후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했고, 내가 통계를 인용할 때마다 내 가치관에 집중하라며 퇴짜를 놓았다.

나는 아기가 생기면 우리 가족에게 큰 기쁨이 되리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내가 죽은 뒤 루시에게 남편도 아기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최종적인 결정은 루시가 내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그녀 혼자 아기를 키워야 할 텐데, 내 병이 악화되면 나까지 돌보느라 더 힘들 것이었다.

"아기와 헤어져야 한다면 죽음이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아기는 멋진 선물 아니겠어?" 내가 말햇다. 루시와 나는 고통을 피하는 것만이 삶은 아니라고 느꼈다.

수년을 죽음과 함께 보낸 후 나는 편안한 죽음이 반드시 최고의 죽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아기를 갖기로 한 결정을 양가에 알리고, 가족의 축복을 받았다. 우리는 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죽음을 이해하고 싶었던 청년에게 불치병은 완벽한 선물이 아닌가?

죽음을 실제로 겪는 것보다 죽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마 나자신의 죽음을 대면하는 일이 이토록 혼란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다.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류의 양심을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젊은 시절의 나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내 영혼을 들여다보니, 연장은 너무 약하고 불은 너무 뭉근해서 인류의 양심은커녕 내 양심조차 벼리지 못했다.

결국 이 시기에 내게 활기를 되찾아준 건 문학이었다.

여느 때처럼 나는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고, 아침을 먹은 다음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은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I can't go on. I'll go on)."

그날 아침 나는 결심했다. 수술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왜냐고? 난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바로 나니까.

거기에 그것이 있었다. 새로운 커다란 종양이 우중엽을 채우고 있었다. 마치 지평선을 막 벗어난 보름달 같은 놈이. 예전 찰영 결과를 다시 보니, 새로 생긴 종양의 희미한 흔적을 알아볼 수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유령 같았던 조짐이 이제 뚜렷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화나지도 겁먹지도 않았다. 정말로 그랬다. 그것은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처럼, 객관적 사실이었다.

앞으로 받게 될 치료는 더 힘들 것이고, 오래 살 가능성은 더 희박해졌다.

신경외과 근무는 몇 주 혹은 몇 달, 어쩌면 평생 못할 수도 있다.

월요일 부터 화학요법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곧바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주 피곤했고 온몸이 나른했다. 큰 즐거움이었던 식사는 이제 바닷물을 마시는 일처럼 되어버렸다. 갑자기 내 모든 기쁨에 소금이 뿌려졌다. 아침에 루시가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서 줬는데, 마치 소금을 핥는 것 같았다. 나는 베이글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책을 읽는 것도 힘들었다.

수료식 날이 왔다. 침실에 서서 7년 레지던트 생활의 정점인 수료식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차려입고 있는데 갑자기 지독한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화학 요법을 받느라 평소에 파도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그래서 견디는 데에도 익숙해진 메스꺼움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녹색 담즙을 토하기 시작했고, 그 분필 같은 맛은 위산과 확연히 달랐다. 그건 내장 깊숙한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결국 나는 수료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루시의 분만 예정일은 아무런 진통 없이 지나갔고, 내 퇴원 일정도 드디어 잡혔다. 암 진단을 받은 뒤로 체중이 18킬로그램 이상 줄었고, 지난주에만 7킬로그램이 빠졌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와 같은 몸무게가 되고 말았다. 머리카락 역시 숱이 엄청나게 줄었다. 특히 지난달에 유독 많이 빠졌다. 나는 다시 깨어나 세상을 민감하게 의식하게 되었지만, 형편없이 시들어버렸다. 피골이 상접해서 마치 살아있는 엑스레이 사진 같았다. 고개를 드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물 잔 하나 들어 올릴 때도 양손을 써야 했다. 독서는 아예 생각도 못했다.

에마에게 진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장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루시가 진통 중이라 병원에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장 병원으로 돌아갔고, 아버지는 내 휠체어를 밀어주었다. 나는 추워서 떨릴까 봐 해골 같은 내 몸을 보온 팩과 담요로 감싸고 분만실의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간이침대에 누워 루시에게 미소 지으며 아내의 배가 부풀어오르는 걸 지켜봤다. 앞으로 루시와 내 딸의 삶에는 많은 것들이 부재할 것이다. 내가 아내와 딸 옆에 지금처럼만 존재할 수 있다 해도 나는 담담히 받아들이겠다.

간호사는 아이의 머리가 밖으로 나오자 나를 보며 말했다. "먼저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따님은 선생님과 머리 색깔이 같네요. 숱도 많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분만의 마지막 단계를 치르고 있는 루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루시가 마지막으로 힘을 한 번 주자, 7월 4일 새벽 2시 11분에 우리 아기가 세상에 나왔다. 이름은 엘리자베스 아카디아, 줄여서 케이디였다.

"아버님, 따님을 한번 안아보시겠어요?" 간호사가 내게 물었다.

"글쎄요, 내 몸이 너무 차가워서."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안아보고 싶어요."

그들은 내 달을 이불로 감싸서 내게 건네주었다. 한쪽 팔로 아이의 무게를 느끼고 다른 팔로 루시의 손을 잡고 있으니 삶의 가능성을 우리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내 몸의 암세포는 여전히 죽어가거나 아니면 다시 자라고 있을 것이다. 내 앞에 펼쳐진 넓은 지평선에서 나는 공허한 황무지가 아니라 그보다 더 단순한 어떤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계속 글을 써내려가야 할 빈 페이지였다.

그래도 우리 집에는 활기가 넘친다.

하루가 다르게, 한 주가 다르게 케이디는 성장하고 있다. 처음으로 뭔가를 움켜잡고, 처음으로 미소 짓고,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케이디의 주위에는 새로운 기운이 환하게 빛난다. 케이디가 내 무릎에 앉아 형편없는 내 노래 솜씨에도 좋아하면서 미소를 지을 때면, 온 집안이 환해지는 기분이다.

죽음은 예상보다 느리게 올지도 모르지만, 원하는 것보다는 분명 빠르게 닥쳐올 것이다. 이런 자각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가장 명백한 반응은 정신없이 움직이려는 충동일 것이다. 즉, 여행도 하고, 근사한 식사도 하고, 여태껏 접어둔 많은 소망을 성취하면서 '삶을 만끽하는' 것이다. 하지만 암은 무자비하게도 시간뿐만 아니라 기력까지 빼앗아버려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의 양이 크게 줄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은 팽창한다면, 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시간은 수축될까? 내가 보내는 하루는 엄청나게 짧아졌다.

오늘과 내일을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되자,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5년 후에 뭘 하고 있을까 늘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5년 후에 내가 뭘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죽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건강할 수도 있다.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될지는 정말 모르는 일이다.

동사의 시제 역시 뒤죽박죽이 됐다. "나는 신경외과 의사이다.", "나는 신경외과 의사였다.", "나는 이전에 신경외과 의사였고 앞으로 다시 의사가 될 것이다." 이 중에 대체 어떤 것이 맞을까?

나는 지금 어느 시제에 살고 있는가? 현재 시제를 넘어 과거 완료 시제로 들어섰나? 미래 시제는 공허해 보이고 다른 사람들이 입에 올리면 귀에 거슬린다.

이런 과거 완료 상태에 도달한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대부분의 야망은 성취되거나 버려졌다. 어느 쪽이든 그 야망은 과거의 것이다. 미래는 이제 인생의 목표를 향해 놓인 사다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는 현재가 되어버렸다. 돈, 지위, <전도서>의 설교자가 설명한 그 모든 허영이 시시해 보인다. 바람을 좇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절대 미래를 빼앗기지 않을 한 가지가 잇다. 우리 딸 케이디. 나는 케이디가 내 얼굴을 기억할 정도까지는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목숨은 사라지겠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

이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뿐이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스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에필로그 | 루시 칼라니티

2015년 3월 9일 월요일, 폴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병원 침대에서 숨을 거두었다. 8개월 전 우리 딸 케이디가 태어난 분만 병동에서 20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케이디가 태어난 지 다섯 달이 되어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던 즈음, 타세바와 화학 요법이 더 이상 효과가 없어 복용하게 된 3차 치료제 역시 폴에게 듣지 않게 되었다.

겨울이 지나 봄에 접어들어 우리 동네의 별목련이 화사한 분홍색으로 피어났을 때쯤 폴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2월 말즈음 그는 편안하게 숨을 쉬려면 별도로 산소 공급을 받아야 했다.

폴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점점 더 빨라졌고, 발음도 종종 불분명했으며, 끊임없이 토악질을 했다. CT 찰영과 뇌 MRI 결과를 보니, 폐암은 더 심해졌고 뇌에도 새로운 종양이 자라나 있었다.

일요일 아침 일직 폴의 이마에 손을 대봤더니 불덩이 같았다.

나는 폴의 아버지와 형과 함께 그를 응급실에 데려갔고, 폐렴일 경우에 대비하여 항생제를 처방받은 뒤 몇 시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잠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조용히 거실로 나오니 시아버지도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나는 벌써부터 그가 그리웠다.

일요일 저녁, 폴의 상태가 돌연 나빠졌다.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숨을 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폴은 이번엔 들것에 실려 응급실로 들어갔다.

늘 그랬듯 의료진은 폴을 따뜻하게 맞았지만, 그의 상태를 보자마자 발빠르게 움직였다.

폴은 들것에 실려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예전에 그가 맡았던 많은 환자들이 신경외과 수술을 받기 전이나 후에 병과 힘겹게 싸웠던 곳이었다.

자정 무렵, 오랫동안 폴의 조언자 역할을 해줬던 중환자 담당의가 치료 방법을 가족과 의논하러 왔다. 그는 바이팝은 미봉책이라고 했다.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시술은 목에 삽관하여 인공호흡을 시키는 것이었다.

폴은 대안을 검토하더니 결단을 내렸다. 죽음이 더 확실히 그리고 더 빠르게 찾아오겠지만, 삽관 대신 안락치료를 선택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혈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계속 상승 중이었다. 호흡을 유지하려면 삽관은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갑작스럽게 악화된 폴의 상태가 회복될 가능성이 있는지 최대한 확실하게 알려달라고 의사들에게 부탁했다.

"폴은 성공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은 시도는 바라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가망이 없다면, 마스크를 벗고 케이디를 안고 싶어 해요."

바이팝 마스크의 콧대 위로 그의 검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폴은 부드럽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난 준비됐어."

나는 가슴이 미어져 침대로 올라갔다.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으로 함께 누웠다.

우리는 이렇게 가까운 미래에 폴의 임종이 다가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22개월전, 폴이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지금 이 병원 건물의 다른 층에 있는 침대에서 우리는 부등켜안고 울었다. 8개월 전, 케이디가 태어난 다음 날 나는 내 병원 침대에서 폴과 껴안고 오랜만에 편안하고 긴 잠을 잤다.

나는 이제 폴이 내 품에서 예전처럼 편안하게 위로받기를 간절히 바랬다.

한 시간 뒤, 마스크가 제거되고 모니터가 치워졌다. 이젠 모르핀이 정맥 주사를 통해 폴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아홉 시간 넘게 우리 가족은 그의 곁을 지켰다. 의식을 잃은 폴은 눈꺼풀을 닫은 채 드물게 숨을 쉬었다.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폴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정말 용감한 팔라딘이야." 그리고 나는 그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서 우리가 지난 몇 달 동안 함께 지은 시를 나지막하게 읊었다. 그 시의 핵심은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였다.

북서쪽으로 난 병실의 창을 통해 따뜻한 저녁 햇살이 비칠 때 쯤 폴의 숨소리는 더 조용해졌다. 케이디는 잘 시간이 다가오자 통통한 손으로 눈을 비볐고, 가족의 지인이 케이디를 집으로 데려다줬다. 나는 그 전에 케이디의 뺨을 폴의 뺨에 가져다 댔다. 부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비슷하게 삐뚜름히 기울어졌다. 폴이 그토록 사랑한 이 아이는 이것이 마지막 작별의 순간이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9시 직전, 폴의 입술이 벌어지고 눈이 감겼다. 폴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마지막으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숨결이 바람 될 때>> 는 폴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는 바람에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미완성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완성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폴이 직면한 현실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삶의 마지막 몇 해동안 폴은 목적의식을 잃지 않고 또 움직이는 시곗바늘에 자극 받으며 쉼 없이 글을 썼다.

이 책에는 모자란 시간과 싸우는 절박함, 중요한 얘기를 꼭 전하고자 하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폴은 의사이자 환자로서 죽음과 대면했고, 또 그것을 분석하고, 그것과 씨름하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폴은 제일 친한 친구인 로빈에게 보내는 이메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충분히 비극적이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 독자들은 잠깐 내 입장이 되어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야. '그런 처지가 되면 이런 기분이구나 ..... 조만간 나도 저런 입장이 되겠지.' 내 목표는 바로 그 정도라고 생각해. 죽음을 선정적으로 그리려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을 때 인생을 즐기라고 훈계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지." 물론 폴은 그저 죽음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죽음을 용감하게 헤쳐 나갔다.

폴은 암 진단을 받은 날 소리 내어 울었다.

그는 수술실에서 보낸 마지막 날에도 울었다. 폴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줬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불치병에 걸렸어도 폴은 온전히 살아 있었다. 육체적으로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활기차고 솔직하고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나는 폴이 세상을 떠나면 내 인생에는 오로지 공허와 슬픔만 남을 줄 알았다.

끔찍한 슬픔과 비통함의 무게를 못이겨 때로 몸을 떨며 한탄하면서도 여전히 큰 사랑과 감사를 계속 느낄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폴은 세상을 떠났고 나는 거의 매순간 그가 사무치게 그립지만, 우리가 여전히 함께 만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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