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정
대구 출생.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잡지 기자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기업 브랜드 홍보 담당자를 거쳐 <대학내일> 디지털 미디어 편집장으로 일했다. 대학생과 20대 트렌드, 여성, 인간관계, 심리학이 주요 관심사다. 대학내일 20대 연구소와 함께 책 《20대를 읽어야 트렌드가 보인다》, 《20대가 당신의 브랜드를 외면하는 이유》를 제작했다. <대학내일>, <브런치>, <페이퍼>, <빅이슈>등에 칼럼을 쓰고 있으며 OnStyle<열정같은 소리>, cbs<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등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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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착한 사람이 될 필요 없어
갑질은 계속된다, 멈추라고 하지 않으면
김찬호 교수의 책 <모멸감>을 보면, 자신의 결핍과 공허를 채우기 위해 한국인이 가장 많이 취하는 방법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을 모멸하는 것이라고 한다. 위계를 만들어 누군가를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습관처럼 곱씹던 밤이 있었다. 터벅터벅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어도 밖에서 묻혀온 부정적인 말들은 털리지 않고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대학 때 생활비를 벌기위해 주말이면 영화관, 호프집, 패밀리레스토랑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에겐 긴장된 일터가 손님들에겐 서비스를 받으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힐링의 장소였다.
출근할 때면 걸리적거리는 자존감을 작게 접어서 집에두고 나서곤 했는데, 너무 자주 숨겨두다 보니 정작 필요할 때조차 꺼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머리가 나쁘니까 이런 데서 일하지” 같은 말을 손님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들만이 아니다. 그런 이상한 말은 도처에 있었다. 대학 때 사귀던 연상의 남자 친구는 “넌 여자가 기가 너무 세서 문제야”라고 말했다. 강의 중 “여자들은 이기적이라 기업이 싫어한다”라고 한 교수도 있었다. 덩치 큰 여자 후배가 치마를 입고 온 날, 남자 선배가 낄낄대며 말했다. “이야, 너 용기 있다!” 이처럼 편견에 찌든 말, 고압적인 말, 폭력적인 말들은 나를 쪼그라들게 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사람들의 이상한 말에 분명히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무례한 사람들은 내가 가만히 있는 것에 용기를 얻어 다음에도 비슷한 행동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에서 만나는 다음 사람들에게도 용인받은(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행동을 반복했다. 또한 나는 그런 말에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패배감을 쌓아갔고, 그렇게 모인 좌절감은 나보다 약자를 만났을 때 터져 나오기도 했다. 갑질의 낙수 효과다.
무례한 사람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건 아니다. 사람은 역할에 따라 적절한 옷으로 갈아입는데, 어느 순간부터 ‘갑의 옷’을 벗는 걸 잊은 것이다. 회사에서 대표인 사람이 집에서나 친구를 만날 때조차 대표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면서 행동을 제지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자 자신이 옳다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갑질’, ‘개저씨’ 같은 한국어가 수출되는 세상이다. 영국 매체 〈인디펜던트〉는 이 표현을 설명하며 ‘갑질’은 한국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갑질의 대물림은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 그러려면 사회적으로 서로의 갑질을 제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누구든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 장려될 때,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문화가 우리의 유산으로 남겨질 것이다. 참는 것이 미덕인 시대는 끝났다.
둘째 딸은 왜 항상 연애에 실패할까
1년간 주간지에 연애 상담 칼럼을 연재한 적이 있다. 대학생들이 연애에 관련된 고민을 보내면 그걸 읽고 조언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불행한 연애로 고민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읽거나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나는 이상한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다. 집착하는 남자를 떠나지 못하는 여자,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남자에게 휘둘리는 여자, 착한 여자 콤플렉스로 이용당하는 여자 등 고통스러운 연애를 반복하는 여자 대부분이 성장기에 가족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경험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가족 내에서 첫째나 막내 때문에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된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고, 자존감이 낮았으며, 또래보다 일찍 연애를 시작하는 경향이 있었다. 위로는 언니가 있고 아래로는 남동생이 있는, 이른바 끼인 둘째 딸이 특히 많았다. 나는 궁금했다. 자기파괴적인 연애를 반복하는 것과 성장 과정의 애정 결핍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출생 순서에 숨겨진 심리를 연구한 가족심리 전문가 케빈 리먼은 둘째나 셋째 등 중간에 태어난 사람들은 ‘소외감’, ‘무시당하는 느낌’을 다른 형제에 비해 더 자주 받는다고 말한다. 부모들은 첫째에게는 임신 전부터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설렘과 기대 속에 키우지만, 둘째부터는 그러지 않는다. 그래도 막내에게는 또 다른 애정을 보이지만 둘째는 그것도 기대할 수 없다. 가족 앨범에서 둘째 아이의 독사진이 다른 형제에 비해 얼마나 적은지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도 둘째 딸이다.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한 대구에서 태어났는데,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엄마는 나를 낳고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언니나 동생과 달리 내게는 돌과 백일 사진이 없다는 사실, 설날 세배를 하면 항상 어른들이 언니는 언니니까 만 원을 주고 동생은 아들이어서 만 원을 준다면서 내게는 오천 원을 줬던 일, 걸핏하면 첫째나 막내와 비교당하던 일 등은 나 스스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다. 가족은 내게 무한한 사랑과 인정을 주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를 나 자체로 사랑해줄 수 있는 친구와 연인에게 집착했다.
꼭 둘째 딸이 아니어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자신이 그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상대가 작은 호의만 보여도 금방 사랑에 빠져버린다.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은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달콤한 말로 조종하는 사람에게 속기도 쉽다.
"날 사랑하는 게 맞아?" 하고 의심하고 집착하며, 상대를 시험하려 한다. 눈치를 보는 습관에 젖어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상대방을 고려하느라 결단을 내리지 못하기도 한다.
나는 칼럼에서 나의 예전 모습과 닮은 여자들에게 그 상황에서 벗어났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해주었다.
첫째, 스스로에게 연민을 가지는 것에서 벗어날 것. 그럴수록 너를 함부로 대해도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주변에 늘어난다. ‘내 인생은 원래 불행해’라고 말하는 걸 그만둬라.
둘째, 일상에서 작은 거절을 조금씩 해볼 것. 거절도 근육이 필요한 일이라 처음에는 어렵지만 작은 것부터 해보다 보면 갈수록 쉬워진다. 의외로, 거절을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너를 진짜로 사랑하는 남자라면 네가 거절을 한다고 해서 떠나가진 않는다.
셋째,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을 것. 자존감이 낮으면 관계를 끝낼 때가 되어도 ‘이 사람 말고 또 누가 나를 사랑해주겠어···’ 하고 질질 끈다. 일상에서 작은 성취의 경험을 쌓고 온전히 존중해주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면 인간관계에서 자꾸 무리하는 습관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것들이 바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천히 시도하고 또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PART 2. 좋게좋게 넘어가지 않아야 좋은 세상이 온다
불행하면 남에게 관심이 많아진다
대학 졸업 후 혼자 서울에 올라와 살았다. 단돈 50만 원을 들고 말 그대로 '무작정 상경'을 한 거였다. 서울은 '밑에서 올라온' 사람들에게 따뜻한 곳이 아니었다.
살던 고시원에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데 앞방 여자가 방문을 노크했다. "쉽, 드라이기 쓰지 마세요." 살지 않는 척 살아라, 고시원의 생활 수칙이었다.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는 날이 늘었다. 누군가와 통화하듯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길을 걸을 땐 그날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중얼거리기도 했다. 극도의 외로움이 가장의 친구를 만들어낸 거다.
또 우울감은 다른 사람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 타인과 세상에 대한 화로 번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동기를 비꼬아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특정인에 대한 분노가 커지기도 했다. 피해의식이 발동해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런 상대가 지속되면서 다른 사람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누군가 힘들다고 하면 '너만 괴롭냐? 나도 괴로워', 겨우 그런 걸로 힘들다고 해?' 하는 마음이 욱하고 드는 것이다. 자신의 힘겨움에 압도되어 남의 상태를 제대로 알아줄 심적 여유가 없다는 증거다.
이런 마음의 감기들을 평소에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다는 낌새가 보이거든 잠시 쉬어 가야 한다. 요새 나는 체중을 재듯 주기적으로 내 마음의 상태를 지켜본다. 상태가 나쁠 때 단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자꾸 화가 나고, 별것 아닌 일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증상이 보이면 일을 좀 줄이면서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최소화한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인간관계만 해도 너무나 많다. SNS의 생활화로 언제나 소통하고 있다는 환상이 현대인을 더욱 좌절하게 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친구의 근황을 보며 질투하고, 수시로 울리는 카카오톡 알람과 채팅방에 매달리는 일상은 너무 얕고 자극적이어서 마음에 병을 불러들이기 쉽다.
내 인생은 롱테이크로 촬영한 무편집본이다. 지루하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진다. 반면 다른 사람의 인생은 편집되고 보정된 예고편이다. 그래서 멋져 보이는 것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나 혼자만 힘든 것같이 느껴진다. 결국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에 가득 차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처럼 불행한 사람들은 갑질을 하고서도 갑질인지 모른다. 인정해주는 곳이 없으니 자꾸 “내가 누군지 알아!” 하고 소리친다. 인간관계에서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고 인과관계를 처리하는 회로가 무너진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를 알아달라고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스스로 충만하면 남의 인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으니까.
PART 3. 자기표현의 근육을 키우는 법
인생 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
너랑 나랑 2인실을 쓰면 돼. 물론 침대는 따로 쓰고.” 런던에서 출발한 버스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도착하기 직전, 일행이던 남자가 말했다. 숙소는 어디냐는 질문에 그가 한 대답이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대학 때 간 첫 해외 여행지는 런던이었다. 꼭 한 번은 해외로 나가보고 싶어 돈을 모았지만 한 시간에 3,500원짜리 아르바이트로는 생활비 대기에도 빠듯했다. 좌절하던 차에 어학연수 중인 선배 언니가 런던에 오면 재워주겠다고 제안했다. 숙박비만 줄어도 그게 어딘가. ‘빈말이었으면 어떡하지? 너무 실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애써 무시했다. 염치나 예의처럼, 인격 중 좋은 것들은 대부분 지갑에서 나오는 것 같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특가로 비행기 왕복 티켓을 사고 남은 100만 원 정도를 들고 런던으로 떠났다. 스콘으로만 끼니를 때워도, 무료 미술관 위주로만 돌아다녀도 행복했다. 선배 언니의 옆방에 유학 중인 한국인 남성이 살고 있었는데 덩치가 커서인지 조금만 움직여도 땀을 뻘뻘 흘렸다. 그가 런던 외에는 어딜 가려는지 묻기에, 2주 후 열리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가려고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자기도 거기 갈 생각이었다며 반색했다. 하는 김에 버스와 숙소를 같이 예약하겠다며 정산은 그 후에 하자기에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떠난 버스 안에서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미리 말했으면 내가 따로 숙소를 예약했을 거라고 항의하자 그는 침대를 따로 쓰는데 뭐가 문제냐는 거였다. 영국 여자였다면 별로 개의치 않았을 거라며 나를 꽉 막히고 예민한 여자 취급을 했다.
지금 같았으면 쌍욕을 해줬을 텐데, 그땐 “그냥 여기서 헤어지죠”라고만 하고 돌아섰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숙소를 구하러 갔다. 극성수기라 빈방이 없었다. 열 군데 넘게 돌았지만 허사였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했는데, 내가 그럼 그렇지. 대구 촌년이 외국 구경 한 번 하겠다고 주제넘게 설친 대가구나.’ 울면서 길을 걸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
노숙을 할 생각이었다. 밤새 읽으려고 가져온 책을 꺼내는데 여성 둘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한국인이시죠?” 내가 들고 있는 책을 보고 한국인인 걸 알았다며 길을 묻기에 답해주었다. 두 사람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내 숙소는 어디냐고 물었다. 1박 2일로 온 건데 숙소 예약에 문제가 생겨 오늘 밤은 역에 있을 거라고 했더니 놀라운 제안을 했다. 자기들이 묵는 숙소가 3인실인데 침대 하나가 비어 있다고, 공짜로 재워줄 테니 가자는 거였다.
고민 끝에 따라간 숙소는 넓고 깨끗했다. 땀에 범벅된 몸을 씻고 나오니 언니들이 와인과 치즈를 꺼내주었다. 둘 다 30대 초반으로 서울에서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으며, 휴가를 받아 여행 왔다고 했다. 그날 처음 본 사람들에게 가족들에게도 못 해본 이야기를 했다. 역에서 혼자 자려고 했던 이유부터 시작해서 원래가 불행에 익숙하다는 것, 자존심은 센데 자격지심도 있어서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 대학을 졸업하면 글 쓰며 살고 싶은데 아마 안 될 것 같다는 이야기 등을 두서없이 했다.
언니들이 해준 이야기는 완벽했다. 20대 초반 대학생에게 30대 초반의 직장인 여성은 대단한 어른이다. 그 시기에 듣고 싶었던 말을 어른들에게 넘치게 들은 밤이었다. “너는 지금 용기 있는 여행을 하고 있어”, “대단하다”, “넌 할 수 있을 거야” 같이 포근한 격려들. 그때 내 안에 불씨 같은 것이 피어나는 걸 느꼈다. 그날 밤엔 설레서 잠이 안 왔다. 아침이 됐다. 한국에선 눈치 보여서 카디건 없이는 못 입던 민소매 원피스를 입었다. 언니들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가방에 넣고 숙소를 나섰다. ‘언니들 말이 맞았다는 걸 보여줘야지.’ 한국에선 한 번도 못 해본 생각도 했다. ‘나 어쩌면 운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만약 그때 버스에서 거절하기가 어려워 애써 ‘괜찮을 거야’ 생각하면서 그를 따라갔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이 놀라운 행운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그러게 그 남자를 뭘 믿고 따라갔어?” 하는 비난을 들을 수도 있었겠지. 그날 이후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됐다. 종종 혼자 여행을 다녔고, 새로운 것을 보면 일단 해보기로 하는 쪽이 된 것이다. 그렇게 모험을 즐기면서 만든 나만의 인생 구호도 있다.
‘인생 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
선을 자꾸 넘는 사람과 대화하는 법
심리학 용어 중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라는 말이 있다. 개인이 쾌적하게 있기에 필요한 점유공간을 뜻하는 말인데, 나라마다 사람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거리가 다르다. 예를 들어 일본은 1.01미터, 미국은 89센티미터 정도라고 한다. 미국인보다 일본인이 안전 거리를 더 길게 둔다는 얘긴데, 한국인은 아마도 미국인보다 일본인에 가까울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퍼스널 스페이스란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마음의 거리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낯선 사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날씨 정도를 화제에 올릴 뿐이지만, 친분이 있는 사람과는 가까이 앉아 깊이 있는 주제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 마음의 퍼스널 스페이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영역의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타인을 대할 때 관계의 친밀도에 따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기에 인간관계를 원만히 할 수 있다. 반면, 이 감각이 뒤처지는 사람들은 자꾸만 선을 넘는 발언을 하거나 친밀도에 맞지 않는 질문을 던져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
같은 질문이어도 누가, 어떤 뉘앙스로 하느냐에 따라 나의 대답은 달라진다. 나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지키면서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대화를 종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을 때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는 것이 좋다. 친하지 않은 사람이나 상사에게 갑자기 “요즘 바빠?”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아, 과장님이 더 바쁘실 것 같은데요. 요즘 어떠세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러면 보통 상대는 여기 답하면서 자신이 질문한 의도를 함께 말하기 마련이다. 단순히 안부를 물은 것인지, 업무를 맡기기 위해서인지를 들은 후 나의 상황을 말해도 늦지 않다. 경험상 친하지 않은 친구에게서 갑자기 SNS로 그런 식의 연락이 온 경우는 대개 청첩장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이 경우에는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하고 되물어 질문의 의중을 파악한 후에 “축하해. 그런데 내가 요즘 좀 바빠서 결혼식에는 못 갈 것 같아” 정도로 대답할 수 있다.
질문자의 의도를 곧바로 알 수는 있지만 대답하기 불쾌한 경우에는 딴청을 부리는 것도 방법이다. 예를 들어 “너 페미니스트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네”, “아니요” 같은 대답부터 하지 않고 “페미니스트가 정확히 무슨 뜻이에요?” 또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고 물어보는 식이다.
질문자의 의도를 모드더라도 대답하기 꺼려지는 질문, 논쟁이 예상되는 질문에는 그저 들어주기만 하는 것도 방법이다. 어차피 모든 사람과 토론을 할 수는 없다.
보통 상대가 나를 훈계하거나 떠보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별로 생각을 안 해봤어요" 하고 나의 패를 내보이지 않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 대화를 빨리 종료하는 기술이다.
이처럼 나의 공간을 문득문득 침범하는 사람들은 대개 나를 잘 모르고 스쳐 지나가는 이들이다. 어쩔 수 없이 한 공간에서 계속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일지라도 나의 깊은 감정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는 사람이다. 그런 이들에게까지 나의 공간을 열어 보일 필요는 없다. 또 사람마다 퍼스널 스페이스에 대한 감각이 달라서,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훅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관계를 이어가려면 나름의 대처법이 필요하다. 평정을 유지하면서 나만의 고유한 공간 감각을 고수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나를 지키는 법’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PART 4. 부정적인 말에 압도당하지 않는 습관
부정적인 말에 압도당하지 않는 습관
애정 없는 비판에 일일이 상처 받지 않기
마음의 근육 키우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멘토를 찾지 말 것
직장 상사가 안하무인이라면
머리가 좀 나쁘신 것 같아요.” 순간 머릿속의 퓨즈가 휙 소리를 내며 끊겼다. 전화기를 들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렸다. 잡지 기자로 일하다 팀을 옮겨 국내 대기업의 온라인 홍보 대행 일을 하게 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기업의 큰 행사를 홍보하는 콘텐츠를 작성하고 컨펌을 받는 과정에서 담당자가 과도하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큰 실수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설명한 내용을 다시 확인하려고 하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머리가 나쁜 것 같다'라니. 사람을 깔아뭉개는 발언이었다.
그날 밤엔 너무 슬퍼서 잠들지 못했다.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한동안 그와 연락을 해야 할 때가 되면 머리가 묵직해졌다. 무례한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이렇게 안하무인인 사람에게, 이렇게 권력 관계가 철저한 사람에게 내가 어떤 대응을 할 수 있겠는가. 설령 대응한다 한들 그는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그 외에도 그가 나를 ‘길들이기’ 위해 공격적으로 말할 때마다 위축됐다. 자기가 생각해도 좀 심하게 몰아붙였다고 생각된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크게 칭찬했다. 나는 점점 애완견처럼 그의 기분이 어떤지 살피게 됐다. 그가 나를 칭찬한 날에는 온종일 기뻤고, 화를 내면 오랫동안 우울한 기분으로 침잠했다.
그가 한 말들이 자꾸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하던 중, 평소 좋아하던 법륜스님의 강연을 접하게 됐다. 한 여학생이 스님에게 고민을 상담했다. “스님, 어떤 사람이 저에게 상처를 준 게 자꾸 생각나요. 고등학교 때 학교 폭력을 당했거든요. 저는 아무 이유 없이 욕을 들었는데 남자라서 때릴까 봐 욕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어요. 1년이 지났는데도 자꾸 생각나서 괴로워요.” 내 이야기 같아서 마음이 시렸다. 스님이 물었다. “길을 가는데 갑자기 누가 자기에게 뭘 주고 갔어요. 선물인 줄 알고 열었는데 안을 보니 쓰레기예요. 그럼 질문자는 어떻게 하겠어요?” 질문자가 말했다.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겠죠.”
스님이 이어 말했다. “나쁜 말은 말의 쓰레기입니다.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니고, 그중 쓰레기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가 가만히 있었는데 그 사람이 쓰레기를 던졌어요. 그러면 쓰레기인 걸 깨달았을 때 그 자리에서 쓰레기통에 탁 던져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그 쓰레기를 주워서 1년 동안 계속 가지고 다니며 그 쓰레기봉투를 자꾸 열어보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나한테 쓰레기를 줄 수 있어’ 하면서 그걸 움켜쥐고 있는 거죠. 그 사람은 그 쓰레기를 버리고 이미 가버렸잖아요. 질문자도 이제 그냥 버려버리세요.”
한 번에 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받은 말의 쓰레기도 버리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 나의 감정을 틀어쥐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불쾌했다. ‘너는 쓰레기를 줬지만 나는 받지 않았어. 그럼 그건 네 거지 내 것이 아니야’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그와 업무를 함께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휘둘리지 않으려고 마음속에 금을 그어두고 그를 대했다. 그러자 그의 말에 일희일비하는 정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비난하든 칭찬하든 그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상처를 덜 받게 된 것이다. 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별다른 동요 없이 “네,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서서 잊었다.
사람들은 와이파이처럼 은연중에 에너지와 기운을 주고받게 되어 있다. 나의 그런 모습에 담당자는 당황하면서 나를 만만치 않은 사람으로 느끼는 듯했다. 인정을 갈구하지 않게 되자 그는 되려 나를 의식하기 시작했고, 존중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그가 본 ‘을’이라면 이 정도 길들이기를 했을 때 쩔쩔매면서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뀌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완벽하진 않지만 파트너로서 일하는 모습으로 균형을 맞춰갔다. 그는 나와 우리 회사에 크게 만족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일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2년을 함께 일한 후 우리는 산뜻하게 서로 고마워하며 헤어졌다. 나는 이제 그를 떠올려도 아무 느낌을 받지 않는다.
가끔 일상에서 쓰레기를 휙 던지고 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웃거나 정색하면서 대응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찌할 수 없이 무기력해지는 사람도 있다. 권력 관계가 확고할 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일 때 우리는 상처받은 마음을 안고 오랫동안 곱씹는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하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하는 것이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이 방법을 추천해주고 싶다.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는 울면서 들고 있지 말고 미련 없이 쓰레기통으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PART 5.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살다 보면 무례한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다. 그들은 내게 상처를 주고 당혹감을 안기며, 기껏 붙잡고 사느라 힘든 자존감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들을 처음 봤을 땐 엉엉 울기만 했는데, 계속해서 마주하는 동안 나름의 대응법이 생겨났다. 그들을 만났을 때 내가 대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문제가 되는 발언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이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그렇다. 누군가 그 선을 넘었을 때 경고하는 것은 언어 폭력에 대처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편견이 심한 말을 들었을 때, 흥분하지 않고 “제3자가 듣는다면 오해하겠는데요?”라고 말하거나 “당사자가 들으면 상처받겠네요”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싣지 않고 최대한 건조하게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되물어서 상황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상황을 이해 못 한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되물으면 더욱 좋다. 예를 들어 누군가 농담이라며 “저 사람은 얼굴이 참 이타적이네”라고 한다면 “아, 저 사람이 못생겼다는 뜻이죠?”라고 되묻는 것이다. 그렇게 물어보면 상대는 순간적으로 머쓱해하며 자신의 표현을 점검할 것이다.
세 번째는 상대가 사용한 부적절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해 들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영감탱이는 욕이 아니라 친근한 표현이라서 썼다”고 한다면, “저도 친근하게 영감탱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하고 응수할 수 있다. 상대가 사용한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돌려줄 수도 있다. “가슴이 작은데 왜 브래지어를 해?” 하고 묻는 남자에게 “그럼 오빠는 왜 팬티 입어?”라고 할 수 있듯 이상한 논리로 상대를 공격하는 사람에게는 역지사지를 경험하게 할 필요가 있다.
네 번째는 무성의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육아 전문가들은 아이에게 여러 번 설명했음에도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거나 떼를 쓴다면 달래주지 말라고 조언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만 보거나,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도 방법이라고 한다. 지지받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아이가 상황을 스스로 판단해서 멈추게끔 하는 것인데, 이 원리는 어른에게도 유효하다. 메신저에서 벗어나고 싶은 상황을 마주한다면 “ㅎㅎ” 또는 “그러쿤” 정도로 답해 대화를 중단시킬 수 있다. 정도가 심하다면 아예 메신저를 읽지 않거나 읽었어도 답을 해주지 않는 것이 좋다. 직접 만난 상황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넹” 정도의 표현만 의도적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유머러스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말을 들을 때 특히 유효한데, 누군가 가부장적인 편견이 가득한 말을 할 때 “우와, 조선 시대에서 오셨나 봐요. 상평통보 보여주세요!” 하고 받아치는 식이다. 애정은 없고 자기 자랑만 있는 잔소리를 들으면 “요즘은 잔소리하려면 선불 주고 해야 한다던데요?”라고 하거나 “저희 부모님도 30년 동안 노력하다 포기하셨는데 어떻게, 가능하시겠어요?” 하고 농담하듯 받아치면 상대도 더는 말을 이어가기 힘들 것이다. 말이 길어질 것 같으면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용” 하고 화제를 돌리는 것도 좋다. 단, 농담을 자연스럽게 하는 데는 내공이 좀 필요하므로 경험치가 좀 쌓인 후에 시도하길 추천한다.
둔감함을 키우는 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UN 사무차장보로 있을 때 토크쇼에 출연해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겪는 편견에 대해 조언을 해주실 수 있나요?” 강 장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마음 한구석에 그런 생각이 계속 들 때가 있어요. ‘내가 여자라서 이런 취급을 받는 건가? 내가 한국인이라, 동양인이라 차별받는 건가?’ 상황이 좋고 결과도 좋고 협력도 잘될 때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죠.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거나 원하는 걸 얻지 못할 때, 갈등이 있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있거나 실망할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정말 아무 의미 없는 데서 ‘진의가 뭘까’ 고민하지 않으려고 저 역시도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지 말고요. 상대의 말을 두 번 세 번 곱씹으면서 괜히 넘겨짚지 마세요. 그건 정말 건강하지 않은 업무 습관인데 그 생각에 빠지기가 너무 쉽습니다. 그런 마음의 덫에 빠지는 동료들을 너무 많이 봤어요. 특히 당신이 리더의 자리에 있고 서로 다른 문화권의 동료들을 대할 때는 기본적인 신뢰를 가지고 상황을 바라봐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회사는 기본적으로 이익 창출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집단으로 꾸려진 임시 모임이다. 회사 사람은 친구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같은 동료일 뿐이라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을 하다 보면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가치관을 가진 동료가 있을 수 있고, 면전에서 나와 대립하는 동료가 있을 수 있다.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황에서는 사려 깊게 대하기가 어려워 무심코 말이나 행동으로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 모든 일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고 이유를 곱씹다 보면 나락으로 떨어지기 쉽다.
특히 상대의 행동을 넘겨짚고 곱씹는 버릇을 없애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자꾸만 의도를 곱씹다 보면 피해의식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는 상대의 반응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드러난 사실 자체만 봐야 한다. 그처럼 적당한 무심함과 둔감함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직장에서 이런 마음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스트레스가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내가 만난 성공한 직장인들의 롱런 비결이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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