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결정’ 최고 전문가 올리비에 시보니 교수
기업 CEO(최고경영자) 혹은 오너가 항상 옳을 수는 없다. 회사의 신사업이나 사업 구조조정, 더 작게는 조직 개편이나 외부 인재 수혈이 성공적이지 못할 가능성은 얼마든 있다. 그렇다면 이는 리더가 부족한 탓일까. 이른바 ‘전략적 결정’ 분야에서 세계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HEC파리의 올리비에 시보니(Olivier Sibony·53) 교수는 “결정권자가 아닌, 결정하는 시스템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많은 기업이 ‘위대한 리더’를 맹신(盲信)하다, 실패하면 모든 책임을 리더 탓으로 돌립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대부분의 기업이 체계화된 의사 결정 구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리더가 아니라, 리더가 결정을 내리는 (의사 결정) 구조와 방식이 문제입니다.”
시보니 교수는 1992년부터 25년 간 글로벌 경영 컨설팅 기업 맥킨지에서 미국과 유럽 기업 수백여 곳을 컨설팅하며 기업의 의사 결정 구조에 대한 연구를 해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그의 논문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와 MIT(매사추세츠공대) 슬론 매니지먼트 리뷰의 극찬을 받았고, 2017년엔 프랑스 최고 권위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도 받았다. ‘리더가 뛰어나도, 의사 결정 문화가 잘못된 조직은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 30여 년에 걸친 그의 연구 결과다. 시보니 교수는 “크고 오래된 기업일수록 수십 년간 뛰어난 성과를 보인 사람을 고르고 골라 조직의 리더로 선임한다”면서 “그런 사람이 리더가 된 뒤 큰 실수를 한다면, 이는 개인 문제가 아닌 (의사결정) 시스템 문제”라고 했다.
신종 코로나 대유행(팬데믹) 이후 기업 경영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렵고, 불투명하다. 함께 사무실을 지키던 직원들은 재택근무로 보이지 않게 됐고, 모든 산업 영역에서 디지털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글로벌 대응 강화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은 생존 전략으로 떠올랐고, 미·중 패권 경쟁은 무역을 넘어 기술 분야까지 번지는 등 경영에서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나 많아졌다. CEO의 판단과 결정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갈수록 난감해져 가는 경영 환경을 우리 기업의 리더와 구성원들이 어떤 전략과 태도로 헤쳐 나가야 할지, Mint가 시보니 교수에게 조언을 구했다.
◇“성공한 기업가를 숭배 말라”
시보니 교수는 먼저 “성공한 기업가를 숭배하고 따라 하는 걸 그만두라”고 했다. “스티브 잡스(애플 창업자)나 잭 웰치(GE의 전설적 CEO)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성공한 기업가의 사례는 (과도한 의미 부여로) 운(運) 같은 상황 요인과 주변의 도움마저 개인의 공로로 만들고, 더 나아가 (리더의) 부정적 요인마저 성공 요인으로 착각하게 합니다.”
그는 2011년 미국의 대형 백화점 체인 JC페니가 애플스토어 성공 신화를 쓴 론 존슨을 CEO로 영입해 같은 경영 전략을 구사한 것을 예로 들었다. 존슨 CEO가 취임한 이후 JC페니의 매출은 1년 만에 25% 급감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직원을 2만명이나 해고했는데도 연간 손실액은 10억달러에 달했다. 론 존슨은 결국 1년 반 만에 해임됐다. 시보니 교수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업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지, 10대들이 영화배우를 바라보는 식의 시선이 아니다”라고 했다. 스타 경영자의 방식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성공한 기업가들의 ‘직관’이 허상이라는 건가.
“그들은 천재적이고 독특한 자질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우리가 그걸 재현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천재를 모방하려는 열정은 흔히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성향에 의해 더욱 강화됩니다. 대성공을 이룬 천재의 방식을 따라 해 성공하려면 그 사람 역시 천재여야 합니다. 물론 성공 모델이 유용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려면 같은 소비자층을 목표로 삼으면서 같은 판매 채널을 이용하고, 같은 가격 정책을 채택하는 등 다양한 조건이 부합해야 하죠. 항공사나 식료품 기업, 통신 기업들이 흔히 이런 ‘전략적 모방’ 패턴을 따르지만, 이런 전략도 경쟁사가 곧바로 따라 하는 만큼 지속적인 전략적 우위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서 배워야 하나.
“성공보단 실패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공하는 전략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실패하는 전략은 모두 엇비슷합니다. 기업에서 반복되는 전략적 판단 오류는 크게 9가지 패턴<3면 인포그래픽>이 있습니다. 자신의 견해와 부합하는 쪽으로만 생각하는 ‘확증 편향(偏向)’ 같은 여러 인지(認知) 편향(bias)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타나죠.”
시보니 교수는 저서 ‘선택 설계자들’을 통해 9가지 의사 결정 패턴을 합리적 결정을 막는 함정으로 분류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일수록 그럴듯하게 들리는 ‘스토리텔링의 함정’, 성공한 기업가를 맹신해 그대로 따라하다가 실패하는 ‘모방의 함정’, 결정하지 않으려 애쓰는 ‘관성의 함정’, 리스크를 외면하는 ‘위험 인지의 함정’ 등이 있다.
◇합리적 결정을 막는 9가지 함정
—9가지 패턴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가장 자주 보이고 또 큰 피해를 주는 패턴은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함정’입니다. 확증 편향이나 챔피언 편향(사람을 과신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믿는 경향)에 빠지면 터무니없는 제안도 그럴듯하게 보이게 되죠.”
그는 1975년 프랑스 국영 석유 회사 엘프아키텐(Elf Aquitaine)이 당한 기술 사기 사건을 소개했다. “땅을 굴착할 필요 없이, 기름 냄새를 맡는 특수 장비를 실은 비행기로 유전을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기술이 발전한 지금 들어도 터무니없는 얘긴데, 당시 엘프아키텐은 사기꾼 두 명에게 속아 4년간 10억프랑(현재 가치로 약 5억달러)을 지출했습니다. CEO는 물론 연구개발부의 과학자들까지 사기꾼들이 리모컨으로 조작해 보여준 유전 탐지 이미지를 그대로 믿어버렸죠. 당시 프랑스는 1차 석유 파동 이후 에너지 절약 캠페인이 한창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다양한 사실을 비판적으로 조사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이 기술을 도입해 한 건 올릴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스토리텔링의 마법’에 걸렸던 거죠.”
—드문 사례가 아닐까?
“천만에요. 2004년 미국에서 무대와 배우만 바뀐 채 똑같은 사기가 다시 벌어졌습니다. NASA(미국항공우주국) 엔지니어 출신 CEO가 이끄는 테럴리언스(Terralliance)라는 석유 회사가 비행기를 이용한 석유 탐사 기술을 들고나왔어요. 이번엔 골드만삭스와 테마섹(싱가포르 국영 투자회사) 같은 유명 기업들이 5억달러를 투자했죠. 결과는 ‘파산’이었습니다. 확증 편향이나 챔피언 편향에 빠지면, 사실 확인을 할 때에도 그릇된 요소를 찾으려고 하기보다 기대에 부합하는 요소를 찾는 데 집중하죠. 사람들이 자기 의견에 맞는 기사는 비판 없이 받아들이지만, 상충하는 기사에 대해서는 그것을 무시할 이유를 즉각 찾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더 무서운 건, 확증 편향은 지적 수준과 관계가 없습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인지신경학 연구에선 높은 객관성을 요구하는 법의학자들마저 확증 편향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결정에도 ‘품질관리’가 필요하다
—이런 사고 편향을 어떻게 막을 수 있나.
“집단 지성을 활용한 협업과 의사 결정 과정을 체계화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독단과 인간적 오류를 막는 안전장치죠. 좋은 제품은 체계적이고 엄격한 제조 공정에서 나옵니다. 좋은 결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은 보통 제품에 대해선 엄격한 품질관리 방식을 적용하면서 의사 결정에 대해선 제대로 된 공정을 마련하지 않죠. 실수를 줄이려면 기업의 의사 결정 방식에도 체계적 프로세스를 마련해야 합니다. 보통 의료 수술이나 우주 비행같이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분야일수록 엄격하고 표준화된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WHO(세계보건기구)의 의뢰로 만든 수술 체크리스트가 있습니다. 안전을 위해 정해진 프로세스를 부여하고 일정 정도 협업을 강제하는 내용입니다.”
—기업이 당장 적용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최종 결정을 내리는 건 CEO지만, 결정을 내리기 전 최대한 많은 의견을 균형 있게 접해야 합니다. 개인 차원이 아닌, 조직 차원의 ‘의사 결정 메커니즘’을 추구해야 합니다. 먼저 토론을 체계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규칙 없이 진행하는 토론은 CEO의 측근이나 언변이 좋은 사람이 결정에 제일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법원에서 하듯 판사 역할을 하는 CEO가 양쪽 의견을 모두 듣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레드팀’ 또는 ‘악마의 변호사(devil’s advocate)’라고 하는 역할을 두 명 이상 지정해야 합니다. 이들은 회의에 오른 의제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요인에 집중하고, 반대 의견을 주장하는 의무를 갖습니다. 최소 두 명으로 정하는 건 한 개인에게 미움이 쏠리는 걸 막아주기 때문이죠. 이 방식은 원래 미국 CIA(중앙정보부)에서 개발했는데, 현재 많은 기업에서 쓰고 효과도 입증됐습니다. CEO 서랍에 메모를 넣고 잠그는 기법도 유용합니다. 결정을 내리기 몇 주 전, 꼭 충족해야 할 요건이나 장애 요소를 적어 놓은 메모지를 서랍에 넣어 놓고, 최종 의사 결정일에 꺼내 잠정적으로 내린 결정이 이에 부합하는지 살펴보는 방법이죠. 아직 냉철했던 시기의 자신에게 되묻는 겁니다.”
◇”자신의 의사 결정 방식부터 바꿔라”
—한국처럼 위계를 중시하는 조직 문화에선 CEO에게 대립하는 의견을 내기가 쉽지 않은데.
“대안은 많습니다. 레드팀이 어렵다면 사전 부검(Pre-mortem) 방식을 써봐도 좋습니다. 예컨대 신규 투자 계획을 논한다고 칩시다. 이 투자가 완전히 망했다고 가정하고, 사후 점검 회의 시점에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겁니다. 회의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이 투자 결정이 실패한 원인을 과거형으로 쓰게 한 뒤 한 차례씩 읽게 하면 대립 없이 문제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매번 두 프로젝트를 제시하게 하는 것도 대안입니다. 한 세계적 대기업은 투자 제안자가 대안이 되는 두 번째 투자안을 같이 내지 않을 경우 검토를 아예 하지 않습니다. 추가적 선택지를 만들면 논쟁을 자극하고 찬반 양자택일식 선택을 막아줍니다.”
—프로세스에 대한 강조가 오히려 레드 테이프(불필요한 형식)로 변질할 우려는 없을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제안한 기법들은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을 위한 일종의 카탈로그(제품 목록)입니다. 일률적으로 강요하는 게 아니라 각 회사 문화와 리더 타입에 맞게 골라서 사용하면 됩니다. 스스로 결정을 바꾸려는 노력이면 레드 테이프는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의사 결정 문화를 바꾸면 조직 문화까지 바꿀 수 있습니다.”
시보니 교수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이 기사를 읽고 상사에게 달려가 ‘우리도 의사 결정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절대 말하지 마세요. 당신이 곧 상사고, 우리는 모두 어떤 분야에서 리더입니다. 자신의 의사 결정 방식부터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편향의 가장 큰 사각지대는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출처: 조선일보 2021년 8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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